해설:
시편의 편집자는 표제에서 이 시편이 쓰여진 상황을 밝힙니다. 도엑은 사울 왕의 부관으로서 잔인무도한 사람이었습니다(삼상 21-22장). 사울의 살해 위협을 피해 다윗이 도피해 다닐 때, 도엑은 잠시 동안 다윗을 받아 주었던 아히멜렉 제사장을 사울에게 고발하여 여든 다섯명의 제사장과 그들이 살던 마을 주민 모두를 살해했습니다. 다윗은 권력욕에 눈 멀어 무고한 사람들을 살해한 도엑을 생각하며 이 시편을 썼습니다. 따라서 이 시편은 자신의 욕망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살아가는 사람에 대한 경고이며, 악한 사람에 의해 위협 당하고 있는 의인들에 대한 격려입니다.
다윗은 먼저 악한 일을 음모하고 실행할 뿐 아니라 그것을 자랑삼아 떠드는 행동에 대해 책망합니다(1절). 그 사람의 혀는 “날카로운 칼날처럼”(2절) 사람들을 해칠 일만 생각합니다. 그는 “착한 일보다 악한 일을 더 즐기고 옳은 말보다 거짓말을 더 사랑”(3절)합니다. “남을 해치는 말이라면 무슨 말이든지 좋아”(4절)합니다. 그는 속속들이 죄악에 물들어 있어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죄악에 우리 자신을 내어 주면 결국 이렇게 회복할 수 없이 물들게 됩니다.
이어서 다윗은 그 악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합니다. 악한 자들이 발호하는 동안에는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고 하나님이 무력한 것 같고 무관심한 것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결국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팔을 들어 모든 것을 바로 잡으십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그분의 오래 참으심입니다. 그분의 참으심이 지연될수록 심판은 더욱 강력해지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도엑을 막을 자가 없어 보이지만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람 사는 땅에서 영원히 뿌리 뽑아 버리실 것”(5절)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여 거룩하고 경건하게 살며 때로 악인들에게 무고하게 고난을 당하는 의인은 그 모습을 보고 “하나님을 자기의 피난처로 삼지 않고, 제가 가진 많은 재산만을 의지하며, 자기의 폭력으로 힘을 쓰던”(7절) 사람의 최후가 어떤지를 확인합니다.
그런 다음 다윗은 자신의 선 자리를 다시금 확인합니다. 악인이 잘 되고 의인이 고난 받는 상황이 길어지더라도 자신은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만을 의지”(8절)하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집에서 자라는 푸른 잎이 무성한 올리브 나무처럼”(8절) 될 것입니다. 올리브 나무의 평균 수명은 5백 년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는 사람은 영원히 안전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동시에 그는 주님이 하신 일을 생각하며 홀로 그리고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다짐합니다(9절).
묵상:
오늘의 시편은 우리에게 경고가 되기도 하고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 경고가 되는 이유는 우리도 언제든지 죄악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는 성인과 악마의 가능성이 공존합니다. 성령의 능력 안에서 성인의 모습으로 잘 빚어지던 사람도 한 순간에 죄악에 마음의 눈이 어두워질 수 있습니다. 방비를 게을리 하고 죄악에 우리 자신을 내어 주면, 나중에는 회복할 수 없이 깊이 물들어 버립니다. 모든 지체를 무기로 삼아 악을 행합니다. 그렇게 죄악을 일삼고 살아도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은 즉각적으로 임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어두워지면 그것을 하나님의 부재 혹은 하나님의 무관심으로 간주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결국 심판의 팔을 드십니다. 그 때면 돌이킬 수 없이 늦어 버립니다. 그 이전에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감사히 여기고 회개해야 합니다.
이 시편이 위로가 되는 이유는 의롭게 살고자 하는 우리의 열망에 불을 지펴 주기 때문입니다. 의롭게 살기 위해 힘쓸 때 자주 시험과 유혹과 환난이 찾아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죄를 멀리하고 희생과 헌신의 제사를 바치는 것이 모두 무익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 회의가 올 때 낙심하게 됩니다. 하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바로잡으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상황이 어떻든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헤세드) 안에 거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무성한 올리브 나무처럼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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