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이 시편의 표제는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도피하던 중에 가드의 불레셋 사람들에게 포로가 되었을 때를 배경으로 제시합니다(삼상 21:10-15). 이 시편은 자신을 해치려는 사람들에 의해 사면초가의 상황에 빠졌을 때 다윗이 올렸던 기도라는 뜻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원수들에게 에워싸여 고통 당하고 있으니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1-2절). 하지만 상황에서 오는 두려움의 감정이 압도하려 해도 자신은 오직 하나님께만 희망을 두고 있다고 고백합니다(3절). 하나님께 희망을 두고 의지하면 두려움에 짓눌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육체를 가진 사람이 나에게 감히 어찌하겠습니까?”(4절)라고 담대하게 고백합니다.
다윗은 다시금 자신의 상황을 하나님께 설명합니다. 그를 공격 하려는 사람들은 한 순간도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책잡을 일을 찾고 함께 모여 음모를 꾸밉니다(5-6절). 다윗은 하나님께 그들을 징벌해 달라고 기도합니다(7절). 아울러 그는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난의 무게를 달아 보시기를 청합니다. 그들의 공격을 피하여 방황한 나날을 헤아리고 흘린 눈물의 분량을 재어 봐 달라고 청합니다(8절). 그는 자신이 주님의 이름을 불러 간구하면 원수들이 물러가게 될 것을 믿습니다(9절). 그래서 그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만 찬양 하겠다고 고백합니다(10절). 그럴 때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이 나에게 감히 어찌하겠습니까?”(11절)라고 고백합니다.
11절 이전과 12절 이후의 다윗의 정서는 사뭇 다릅니다. 11절까지의 탄원 기도를 통해 그가 믿음을 회복했기 때문에 12절과 13절에서 그는 하나님께 서원한 대로 감사의 제사를 드리겠다고 기도합니다. 제대로 드린 기도는 이렇게 절망에서 소망으로, 눈물에서 기쁨으로,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기도자의 정서를 변화시킵니다. 자신을 위협하는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전능하신 분의 그늘 아래에 자신이 있음을 확인하기 때문입니다.
묵상:
다윗은 지금 그가 당할 수 없는 강력한 원수들을 맞서고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그 상황을 생각하면 두려움이 압도해 옵니다. 관계가 얽히면 사람이 제일 무서워집니다. 다윗은 그 상황에서 눈을 돌려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는 “하나님은 나의 편이심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9절)라고 고백합니다. 인간적으로 그는 강력한 원수들 앞에 홀로 서 있지만, 믿음의 눈으로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편에 서 계심을 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위협하는 원수들을 보니 가소롭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육체를 가진 사람이 나에게 감히 어찌하겠습니까?”(4절)라고도 했고 “사람이 나에게 감히 어찌하겠습니까?”(11절)라고도 했습니다. 하나님에게 눈 뜨지 못하면 작은 언덕도 넘어설 수 없는 산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에게 눈 뜨고 보면 거대한 산도 작은 언덕처럼 보입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나의 편이심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9절)라고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 고백이 자기 중심적인 맹신의 표현이 되기도 합니다. 잘못은 자신에게 더 많음에도 하나님이 자기 편을 들어 주시기를 구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에게 역겨운 일이 됩니다. 남북전쟁이 한창일 때, 어느 목사가 링컨 대통령에게 “하나님께서 북군의 편을 들어 주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라고 말하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어느 편에 서시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 있느냐 입니다”라고 답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하나님 편에 선다”는 말은 그분의 뜻을 찾고 그 뜻을 따르기에 힘쓴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살기를 힘쓰는 사람만이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고백과 믿음은 상황에서 오는 두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