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표제는 다윗이 유다 광야로 피신해 있는 동안에 이 시편을 지었다고 밝힙니다. 9절과 10절에 암시된 것처럼, 그는 자신을 “죽이려고 노리는 자”들에게 쫓겨 광야로 피신해 있습니다. 그는 사울에게 쫓겨 도피할 때에도 광야를 찾았고, 압살롬의 반란으로 인해 광야로 쫓겨 가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이 시편은 광야로 내몰린 듯한 상황에서 드릴만한 기도입니다.
다윗은 광야에서의 육체적인 목마름을 하나님을 향한 영적 목마름을 상징하는 은유로 사용합니다. 그가 목이 마른 이유는 물기 없는 광야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버림 받은 것 같은 영적 무감각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애타게” 주님을 찾고 그리워 합니다(1절).
하나님을 향한 그의 간절한 기도는 그를 성소로 옮겨 줍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에 눈을 뜨고 그분의 권능과 영광을 본 것입니다(2절).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소는 하나님의 임재에 눈 뜬 자리입니다. 다윗은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헤세드)이 생명보다 더 소중하다고 고백합니다(3절). 따라서 그의 유일한 소망은 생명 다하도록 주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4절). 광야에 도피해 있었으니 그는 허기에 지쳐 있었을 것입니다. “기름지고 맛깔진 음식”(5절)을 먹고 싶은 마음이 간절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을 보았기에 그의 영혼은 만족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나깨나 주님을 묵상하며 찬양할 것을 다짐합니다(6-8절).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영적 감각을 회복한 다윗은 비로소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계시니 그들은 결국 심판 받을 것이라고 믿게 됩니다(9-10절).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다시 높여 주시어 모든 백성에게 칭송을 받게 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회복합니다(11절).
묵상:
사는 것은 곧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 하고 사랑 받는 것이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내면 깊은 곳에 사랑하고 싶은 갈망과 사랑 받고 싶은 갈망을 심어 두셨기 때문입니다. 그 갈망은 오직 “한결같은 사랑”(헤세드, 아가페)에 의해서만 채워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가 범한 원죄로 인해 우리는 그 사랑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사랑 받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 두려움은 우리의 사랑의 능력을 무력화시킵니다. 결국, 우리는 사랑을 알지도, 사랑을 하지도 못하는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갈망을 다른 것으로 만족시키려 합니다. 하지만 대용품 사랑은 그 갈망을 더욱 심화시킬 뿐입니다. 그것이 인간사에서 일상으로 경험하는 두려움과 미움과 의심과 불신과 적의와 갈등과 싸움의 원인입니다.
다윗이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생명보다 더 소중하다”고 말한 것은 시적 표현이 아닙니다. 상징도 아닙니다. 현실입니다. 한결같은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는 한 진짜 살았다 할 만한 생명을 맛보지 못합니다. 우리가 목마른 이유는 그 사랑을 몰라서 그러는 것이고, 우리가 배고픈 이유는 그 사랑을 먹지 못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우리가 두려운 이유도 그 사랑이 없어서 그러는 것이고, 우리가 누군가에게 분노하고 미워하는 이유도 그 사랑이 없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요일 4:18)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에게만 있는 헤세드,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아가페만이 우리 내면에 있는 ‘사랑 받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을 치료할 수 있고, 그 때에야 참된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모두는 다윗처럼 광야에 내몰려 살고 있는 셈입니다. 광야는 영적인 기회의 땅입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결핍되어 있는지를 알게 하며, 그 결핍을 통해 하나님에게 눈 뜨게 만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우리도 하나님의 임재에 눈 뜨고 그분의 한결같은 사랑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