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마가는 세례 받으시는 이야기로 예수님의 이야기를 시작하고, 마태와 누가는 탄생 이야기로 시작하는데, 요한은 “태초”(1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태초”라는 말은 창세기 1장 1절(“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을 생각하게 합니다. 하지만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는 하나님께서 창조 사역을 시작하실 때를 가리키고, 요한복음 1장 1절의 “태초”는 창조 사역을 시작하기 이전의 때를 가리킵니다.
“창조 사역을 시작하기 이전의 때”라는 표현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천지창조 후에야 시간의 흐름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언어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 만들어진 것이어서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는 차원에 대해 설명하려 할 때면 언어가 무용 해집니다. 하지만 어떻게든 표현하지 않을 수 없어서 이렇게 어폐가 있는 표현을 사용한 것입니다.
“말씀”(1절)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로고스’입니다. 일반적인 대화에서 “말씀”은 누군가의 생각을 표현한 언어를 가리킵니다. 하지만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격체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혹은 지혜 자체가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로마 사람들도 ‘로고스’를 인격체라고 생각했습니다. 스토아 학파에서는 인격체로서의 로고스가 인간 사회와 자연 세계를 다스리고 인도한다고 보았습니다. 요한은 그것이 바로 성부 하나님과 같이 태초부터 있었던 신적 인격체라고 말합니다(1-2절). 그래서 그는 ‘로고스’ 앞에 항상 정관사를 붙입니다. 그러므로 제대로 번역한다면, “태초에 그 말씀이 계셨다”라고 해야 합니다.
“그 말씀”은 성부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참여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거듭 반복되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3절, 6절, 9절, 14절, 20절, 24절)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명령 하시기를”이라는 뜻으로 풀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이 표현에서 더 깊은 의미를 봅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말씀이신 그분”이 참여 하셨다는 것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말씀이신 그분 안에서 생명을 얻습니다(3-4절). 그분과 단절되는 것은 곧 죽음입니다. 목숨이 살아 있다고 다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씀” 안에서 있을 때에만 진정한 생명이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그 말씀”을 떠나 참된 생명을 잃고 목숨으로만 살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이미 죽음이 임했고 이미 심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죽음의 상태에 있는 인류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말씀이신 그분이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게 하셨습니다(14절).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어둠 가운데 비친 빛이십니다(9-10절). 이 세상에는 어둠의 세력이 강하지만, 그 어둠이 빛을 이기지는 못했습니다(5절). 개역개정은 “깨닫지 못하더라”고 번역했습니다. 그 말씀이 세상에 오셔서 진리의 빛을 비추셨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 빛을 깨닫지 못하고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11절). 그분을 알아 보고 그분을 영접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됩니다(12-13절).
“육신을 입고 오신 그 말씀”은 하나님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십니다. 그분을 영접한 이들은 그분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은혜와 진리”(14절)는 히브리어로 “헤세드와 에메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언약 백성들을 신실하게 사랑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을 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충만하였습니다(16절).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났던 것은 모세를 통해서였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 만났던 사람이지만, 예수님은 그분의 품 안에 계시던 분입니다(18절). 따라서 모세를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는 불완전했고 예수님을 통해 비로소 완전한 계시가 주어졌습니다(17절).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을 메시아로 여겼습니다. 사도 요한은, 세례 요한이 빛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그는 다만 빛에 대해 증언하기 위해 보냄 받은 사람입니다(6-8절). 실제로 요한은 요단 광야에서 세례를 베풀면서 자신은 그리스도로 보냄 받은 사람이 아니라고 증언했습니다(15절).
묵상:
사도 요한은 우리를 영적 우주 여행 혹은 영적 시간 여행으로 초청합니다. 우주선을 타고 우주 끝까지 가보는 듯한 혹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시간이 시작된 첫 지점을 통과해 나아가는 듯한 여행입니다. 현실로는 가능하지 않은 일을 묵상을 통해서 경험합니다. 천지가 창조되고 시간이 시작되기 이전, 하나님만 존재하던 그 시점으로 돌아가 보게 합니다.
이 지점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제가 동원할 수 있는 언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시간과 공간에 한정된 저의 이성도 이 지점에서 작동을 멈춥니다. 그래서 침묵합니다. 그리고 그 침묵 가운데서 우주와 생명의 원점으로 돌아가는 상상을 합니다. 혹은 어머니의 모태 안으로 들어가 보는 상상을 합니다. 그렇게 상상하고 잠잠히 있다 보니, 먼지와 다를 것이 없는 나의 존재가 영원하고 절대적인 존재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깊은 안식과 평안을 경험합니다.
우리는 우주에 던져진 미아가 아닙니다. 아무 의미 없이 생겨난 우연의 산물이 아닙니다. 이유 없이 생겨나 목적 없이 살다가 의미 없이 스러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영원하고 절대적인 분에 의해 지어진 존재들이고, 그분의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할 존재들이며, 결국 그분에게 돌아갈 존재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존재의 이유와 의미와 목적을 당신의 삶으로써 증명하신 분입니다. 그분 안에서 우리 자신을 다시 발견할 때에만 우리는 비로소 참된 생명을 얻고 어둠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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