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장 1-18절: 시간을 넘어 영원으로!

해설: 

마가는 세례 받으시는 이야기로 예수님의 이야기를 시작하고, 마태와 누가는 탄생 이야기로 시작하는데, 요한은 “태초”(1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태초”라는 말은 창세기 1장 1절(“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을 생각하게 합니다. 하지만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는 하나님께서 창조 사역을 시작하실 때를 가리키고, 요한복음 1장 1절의 “태초”는 창조 사역을 시작하기 이전의 때를 가리킵니다. 

“창조 사역을 시작하기 이전의 때”라는 표현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천지창조 후에야 시간의 흐름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언어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 만들어진 것이어서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는 차원에 대해 설명하려 할 때면 언어가 무용 해집니다. 하지만 어떻게든 표현하지 않을 수 없어서 이렇게 어폐가 있는 표현을 사용한 것입니다. 

“말씀”(1절)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로고스’입니다. 일반적인 대화에서 “말씀”은 누군가의 생각을 표현한 언어를 가리킵니다. 하지만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격체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혹은 지혜 자체가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로마 사람들도 ‘로고스’를 인격체라고 생각했습니다. 스토아 학파에서는 인격체로서의 로고스가 인간 사회와 자연 세계를 다스리고 인도한다고 보았습니다. 요한은 그것이 바로 성부 하나님과 같이 태초부터 있었던 신적 인격체라고 말합니다(1-2절). 그래서 그는 ‘로고스’ 앞에 항상 정관사를 붙입니다. 그러므로 제대로 번역한다면, “태초에 그 말씀이 계셨다”라고 해야 합니다. 

“그 말씀”은 성부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참여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거듭 반복되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3절, 6절, 9절, 14절, 20절, 24절)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명령 하시기를”이라는 뜻으로 풀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이 표현에서 더 깊은 의미를 봅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말씀이신 그분”이 참여 하셨다는 것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말씀이신 그분 안에서 생명을 얻습니다(3-4절). 그분과 단절되는 것은 곧 죽음입니다. 목숨이 살아 있다고 다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씀” 안에서 있을 때에만 진정한 생명이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그 말씀”을 떠나 참된 생명을 잃고 목숨으로만 살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이미 죽음이 임했고 이미 심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죽음의 상태에 있는 인류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말씀이신 그분이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게 하셨습니다(14절).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어둠 가운데 비친 빛이십니다(9-10절). 이 세상에는 어둠의 세력이 강하지만, 그 어둠이 빛을 이기지는 못했습니다(5절). 개역개정은 “깨닫지 못하더라”고 번역했습니다. 그 말씀이 세상에 오셔서 진리의 빛을 비추셨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 빛을 깨닫지 못하고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11절). 그분을 알아 보고 그분을 영접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됩니다(12-13절).

“육신을 입고 오신 그 말씀”은 하나님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십니다. 그분을 영접한 이들은 그분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은혜와 진리”(14절)는 히브리어로 “헤세드와 에메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언약 백성들을 신실하게 사랑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을 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충만하였습니다(16절).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났던 것은 모세를 통해서였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 만났던 사람이지만, 예수님은 그분의 품 안에 계시던 분입니다(18절). 따라서 모세를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는 불완전했고 예수님을 통해 비로소 완전한 계시가 주어졌습니다(17절).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을 메시아로 여겼습니다. 사도 요한은, 세례 요한이 빛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그는 다만 빛에 대해 증언하기 위해 보냄 받은 사람입니다(6-8절). 실제로 요한은 요단 광야에서 세례를 베풀면서 자신은 그리스도로 보냄 받은 사람이 아니라고 증언했습니다(15절). 

묵상:

사도 요한은 우리를 영적 우주 여행 혹은 영적 시간 여행으로 초청합니다. 우주선을 타고 우주 끝까지 가보는 듯한 혹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시간이 시작된 첫 지점을 통과해 나아가는 듯한 여행입니다. 현실로는 가능하지 않은 일을 묵상을 통해서 경험합니다. 천지가 창조되고 시간이 시작되기 이전, 하나님만 존재하던 그 시점으로 돌아가 보게 합니다. 

이 지점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제가 동원할 수 있는 언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시간과 공간에 한정된 저의 이성도 이 지점에서 작동을 멈춥니다. 그래서 침묵합니다. 그리고 그 침묵 가운데서 우주와 생명의 원점으로 돌아가는 상상을 합니다. 혹은 어머니의 모태 안으로 들어가 보는 상상을 합니다. 그렇게 상상하고 잠잠히 있다 보니, 먼지와 다를 것이 없는 나의 존재가 영원하고 절대적인 존재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깊은 안식과 평안을 경험합니다. 

우리는 우주에 던져진 미아가 아닙니다. 아무 의미 없이 생겨난 우연의 산물이 아닙니다. 이유 없이 생겨나 목적 없이 살다가 의미 없이 스러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영원하고 절대적인 분에 의해 지어진 존재들이고, 그분의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할 존재들이며, 결국 그분에게 돌아갈 존재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존재의 이유와 의미와 목적을 당신의 삶으로써 증명하신 분입니다. 그분 안에서 우리 자신을 다시 발견할 때에만 우리는 비로소 참된 생명을 얻고 어둠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9 responses to “요한복음 1장 1-18절: 시간을 넘어 영원으로!”

  1. 빛으로 오신 예수님, 가시광선 이자만 프리즘을 통해 볼수있는 무지개, 우리의 육안으로 보수없는 빛 ,곧 생명의 진리를 생각해보며 그 생명으로 오신 예수님의 참 뜻을 묵상해 봅니다, 빅뱅 이전의 시간과 공간 또 차원을 따질수 없는 그 혼돈 속에서 빛과 생명이 말씀 즉 인격체로 계시며 우주를 통해 빛이라는 명칭을 생명이라는 단어가로 만들어지는 태초를 생각하며 하나님 생명, 빛 .인격 즉 예수님의 동의어를 묵상해 봅니다.
    세례요한을 통한 예수님의 설명으로 부족한 무한이신 하나님 앞에 내 자신을 존재를 생각하며 그 은혜와 진리의 무궁함에 감사를 드리며 오늘 요한 복음을 시작합니다.
    감사가 오늘 하루를 지배하게는 하루로 은총 내려주실 것을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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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주님! 예수님의 값으로 먼지 같은 저를 사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신 그 은혜에 다시 한번 감사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도 그 은혜를 잊지 않고 만 분의 일이라도 아니 일억 분의 일이라도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제가 되기를 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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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창조사역 이전의 말씀을 묵상할 수 있으니 황홀합니다. 그 크시고 높으시며 Another Level의 세계에 계신 하나님을 묵상하고 생각하는 것 만으로도 벅찹니다.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시고, 그로인한 놀라운 은혜와 사랑이 벅차는 하루입니다. 동시에 나의 문제와 상황이 놀라운 말씀앞에 섰을 때 초라해 보입니다. 할렐루야! 나의 초점이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에 맞추며 살기를 기도하는 하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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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제 생각으로는 창조때보다 이전이라는 시간은 어불성설 이지만
    창조주 주님이 티끌같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를 택하신 은혜를 인정
    할때 믿고 감사할수밖에 없습니다. 귀한 말씀을 머리로 이해하려고
    하지않고 마음으로 받고 주님의 자녀로서 합당하게 이웃과 함께 사는
    오늘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말씀으로 오신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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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마음을 깨우고 몸을 지키라는 말씀!
    Do No Harm
    Do Good
    Stay in the Love of God!!!
    Thank you, God. Bless us of 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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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실 때 말씀으로 지으셨습니다. 있으라! 명하시니 생겨났습니다. 말씀이 존재를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존재와 현상을 불러오고 생명을 갖게 하셨습니다. 그 말씀, 그 생각, 그 뜻에 이름을 붙이자면 ‘예수’가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또 다른 이름이고 인격입니다. ‘독생자로 이 땅에 오셨다’라는 표현은 하나님을 인간 세상의 아버지 모습으로 설명하여 아버지와 아들의 친밀함과 일체감을 보여 주는 표현입니다. 하지만 아들이 성년이 되어야 아버지의 일에 동참할 수 있다거나, 아버지가 죽은 후에 대를 잇는다거나 하는 위계의 개념은 아닐 것입니다. 성경을 말씀이라고 부르면 이 때의 말씀이 곧 그 말씀이요 하나님 자체라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경의 권위를 말할 때 이런 시각이 자주 등장합니다. 성경이 하나님을 가리키는 표시이지 하나님은 아니라고 보는 시선도 있습니다. 사람이 제 아무리 똑똑해도 하나님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정의와 해설을 다 모아도 그 조각들로는 ‘하나님’이라는 퍼즐이 완성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를 맛보는 경험은 작아도 풍성하며 짧아도 영원한 것을 우리는 압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지만 예수님은 낮처럼 환하게, “흔하게” plain as day 하나님을 보여주신다고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메시지 성경에서 설명합니다. 여기에 쓰인 day 라는 단어는 겹겹의 의미를 담은 듯 합니다. 빛이 있는 시간, 누구에게나 주어진 하루치의 생명, 일상이라는 반복이 주는 리듬, 한 사람의 일생을 바꾸는 그래서 인간의 역사까지도 바꾸는 우주적인 영향력을 지닌 모멘트…충분하면서 늘 모자란 예수님과의 만남을 오늘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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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어둠을 헤치고 새로운빛을 맞이하는 아침, 따뜻한 차한잔과함께 세상의 잡다한 소리들보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하는 매일이 저에게는 잠잠한 평화와 담대하게 시작할 용기를줍니다. 말씀과함께 귀한 성도님들의 comments 를 읽으면서도 많은 공감과 은혜를 얻습니다. 바라기는… 항상 진실케 내맘바꾸사 하나님닮게 하여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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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그 분에 의해 지어진 우리가, 그분을 따라 살다가 그 분의 품으로 돌아가길 원합니다..
    나의 삶의 존재의 이유와 의미와 목적, 그리고 나 자신을 그분 안에서 발견할 때에만 우리는 비로소 참된 생명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을 기억하며 오늘도 그분을 더 알고, 그 분이 지으신 나를 더 알아가는 하루가 되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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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버어지니아에 계시는 누님을 통해 귀한 말씀을 폴란드에서 묵상하게 되엇습니다.
    은혜을 많이 받고 잇습니다.”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놀라운 주님이 우리에게 향하신 구속의 역사에 감사하며 진리의 빛이 오셔서 깨닫게 하시고 주님의 자녀로 회복하게 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드립니다.오늘도 저에게 존재의 의미와 목적을 주신 주님을 찬양하며 기도 합니다.항상 주남의 영광을 위하여 생각하며 섬기길 기도 합니다.귀한 말씀에 감사 드립니다.폴란드 바르샤바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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