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힌 그 다음 날, 두 제자와 함께 있을 때 예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봅니다. 요한은 두 제자에게 그분이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다시 확인해 줍니다(36절). 그들이 자신을 따르는 궁극적인 이유가 메시아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그분을 따라 가라고 말한 것입니다. 두 제자는 스승의 말뜻을 알아 듣고 예수님을 따라 갑니다. 그들을 보시고 예수께서 “너희는 무엇을 찾고 있느냐?”(38절)고 물으십니다. 그들은 그분을 “랍비님”이라고 부릅니다. 아직 그분이 메시아인 것을 믿지 못한 것입니다.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라는 질문은 “저희가 당신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와서 보아라”(39절)고 허락하십니다.
두 제자 중 하나의 이름은 안드레인데, 그는 형을 찾아가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소”(41절)라고 말합니다. 그 형의 이름이 시몬입니다. 그는 동생을 따라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보시고”(42절)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주목해 보다”는 의미입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의 내면을 꿰뚫어 보시고 “게바”라는 별명을 지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아람어로 ‘바위’라는 뜻이고, 헬라어로는 ‘베드로’입니다. 이 때 예수님은 그가 장차 교회의 기초석의 역할을 할 것이라는 사실도 내다 보셨을 것입니다.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에 의하면, 시몬과 안드레는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중에 예수님의 부름을 받습니다. 여기에 기록된 유다 광야에서의 만남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갈릴리로 돌아가셔서 그들을 찾아가 제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빌립보의 가이사랴에서 시몬이 예수님에 대해 고백했을 때, 그분은 처음 만났을 때 그에게 붙여 주었던 이름을 재차 확인하십니다.)
다음 날 예수님은 유다 광야를 떠나 갈릴리로 돌아갈 계획이었습니다. 그 전에 그분은 한 사람을 더 찾아 가십니다. “만나서”(43절)라는 말은 우연히 마주쳤다는 뜻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찾아 가셨다는 뜻입니다. 빌립은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즉시로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갑니다. 그는 율법과 예언서가 예언한 메시아를 만났다고 나다나엘에게 전합니다(45절). 예수님이 나사렛 출신이라는 말을 듣고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46절)라고 말합니다. 나사렛은 메시아에 대한 예언에서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빌립은 다짜고짜로 “와서 보시오”(46절)라고 말합니다.
나다나엘이 예수께 다가오자 예수님은 그가 거짓이 없는 사람임을 알아 보십니다. 나다나엘은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48절)라고 물었고, 예수님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48절)고 답하십니다. 그 말에 나다나엘은 “선생님, 선생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49절)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예지 능력에 압도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보다 더 놀라운 일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곧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51절)입니다. 여기서 “인자”는 메시아로 오신 당신 자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것은 야곱이 베델에서 꾸었던 꿈을 생각나게 합니다. 꿈에서 야곱은 자신이 누워 있는 곳에서부터 하늘까지 층계가 있고 그 층계 위에 하나님의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듣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야곱은 “주님께서 분명히 이 곳에 계는데도, 내가 미처 그것을 몰랐구나.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 곳은 다름이 아닌 하나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로 들어가는 문이다”(창 28:16-17)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이 땅과 하늘을 잇는 층계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당신의 인격과 말씀과 사역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보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묵상:
예수님은 “말씀이신 그 분”이 육신으로 나타나신 분입니다. 그것을 “성육신”이라고도 부르고 “육화”라고도 부릅니다. 육신을 옷처럼 입고 나타났다는 뜻이 아닙니다. 초대 교회에 그렇게 호도하던 이단이 있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이 그렇게 믿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이 믿던 교리를 “가현설”(docetism)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나사렛 청년 예수가 요단 강에서 세례를 받을 때 “말씀이신 그분”이 그의 육신을 가로채어 3년 동안 사용하고는 십자가에서 운명하기 전에 그 육신을 버리고 떠났다고 가르쳤습니다. 정통 기독교는 이 교리를 이단으로 배격했습니다. “말씀이신 그분”은 잠시 동안 나사렛 청년 예수의 몸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분을 통해 오셨다고 믿습니다.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며 죽으신 그분은 곧 “말씀하신 그분”이었습니다.
“말씀이신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오감으로 포착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분이 육신을 입고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그분이 나사렛 청년 예수입니다. 태초부터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성부 하나님과 함께 온 우주와 모든 생명을 창조하신 그분께서 예수라는 사람으로 우리 가운데 오신 것입니다. 요즘 말로 그분은 “사람인듯 사람 아닌 사람 같은” 분입니다. 그렇기에 그분의 인격, 그분의 말씀, 그분의 행동, 그분의 죽음 그리고 그분의 부활은 “말씀이신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줍니다. “말씀이신 그분”을 알면 또한 성부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와서 보라!”고 초청하십니다. 세례 요한의 두 제자도, 빌립도, 나다나엘도 그분과 함께 지내면서 그분을 보고는 그분이 과연 “말씀이신 그분”이심을 알아 보았습니다.
그분을 알아 보고 나면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안드레가 형 시몬을 찾아가 증언하고, 빌립이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가 증언한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그 사실을 전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분을 만나게 되면 자신이 그동안 찾아왔던 모든 것이 그분에게 있음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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