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3장 1-21절: 위로부터 태어나다

해설:

니고데모는 율법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지도자”(1절)였다는 말은 유대인 자치 의회 산헤드린 의원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는 율법을 연구하고 준수하는 것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가르침에 따라 살아 왔습니다. 하지만 그의 내면에는 구원 받았다는 확신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밤에”(2절)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산헤드린 의원이 이름 없는 전도자를 찾아가는 것은 적잖이 체면 구기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밤에 찾아온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니고데모의 내면에 있던 어둠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는 율법적인 의를 추구했지만 내면에는 여전히 어둠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찾아와 표징을 보고 그분을 믿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2절). 하지만 예수님은 그 고백에 별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2장 23-25절에 밝힌 바 있습니다. 그 대신 예수님은 그가 가지고 있던 문제를 건드리십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3절)를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단언하십니다. 헬라어 ‘아노텐’은 “다시”라고 번역할 수도 있지만 “위로부터”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이어지는 대화를 보면 예수님은 “위로부터”라는 뜻으로 말씀하셨는데, 니고데모는 “다시”라는 뜻으로 알아 듣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다시 날 수 있느냐고 반문합니다(4절). 

예수님은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5절)고 답하십니다. 다시 나는 것 즉 위로부터 나는 것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물과 성령으로 난다”는 말은 “물 즉 성령으로 난다”고 번역해야 옳습니다. 물리적 생명이 모태에서 양수로 지어지듯, 인간의 영은 성령이라는 물을 통해 빚어집니다. 그래서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영에서 난 것은 영이다”(6절)라고 말씀 하십니다. 육신적으로 태어나는 것과 영적으로 새로 지어지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은 마치 바람의 현상처럼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을 알듯, 우리 안에 일어나는 변화를 보고 성령의 임재를 알 수 있습니다(7-8절).

니고데모는 다시 태어나는 일에 대해 한 번도 들어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또 다시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9절)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르는 길이 열리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10-12절). 당신은 하나님에게서 왔기에 그분에게 이르는 길을 아십니다(13절). 그 길을 여시기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입니다(14절). 그분을 믿는 사람마다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15절).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독사에 물려 모두 죽어가고 있던 것처럼, 모든 인류는 죄의 독에 오염되어 죄악을 즐기다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직면하게 되어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하기에는 인간의 본성이 너무도 타락해 있습니다. 외부로부터 구원의 손길이 오지 않는 한 희망은 없습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이유입니다(16절). 하나님의 뜻은 심판이 아닙니다. 심판에 직면한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 그분의 뜻입니다(17절). 심판과 불행은 인류가 스스로 어둠을 선택했기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18-20절). 그 운명을 피하고 하나님의 생명을 얻도록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 아들을 믿는 것이 곧 성령으로 나는 것이요 다시 나는 것입니다(21절).

묵상:

모든 인간은 죄 가운데 있고 그 결과로 영원한 멸망의 운명에 처해 있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구원 받지 못한다는 말은 믿지 않은 까닭에 벌을 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믿었느냐 믿지 않았느냐를 기준으로 어떤 사람은 구원하고 어떤 사람은 멸망시키지 않으십니다. 그냥 두면 모두가 멸망에 이릅니다. 아담 안에서 모두가 죄를 선택하고 어둠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이유는 멸망의 운명에서 우리를 건지시려는 뜻이었습니다. 

믿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구원의 길을 인정하는 것이고, 믿지 않는 것은 그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것은 멸망의 운명에 그대로 머물러 있겠다는 뜻입니다. 믿음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으로 그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 것도 속은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오직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의지하고 믿는 길밖에 없습니다. 스스로에 대한 모든 믿음을 내려 놓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할 때 비로소 그분의 성령이 우리를 새롭게 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만듭니다. 

육신적인 탄생으로 우리는 한 남자와 여자의 자녀가 됩니다. 그것이 첫 번째 탄생입니다. 첫 번째 탄생 이후에 우리는 누구나 참되고 영원한 하늘 아버지를 만나 그분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두 번째 탄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영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1:12). 그것은 오직 성령의 감화로써만 가능합니다. “성령으로 난다”(5절)는 말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는 사건을 말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고, 영원한 생명 안에 들어갑니다(16절). 

4 responses to “요한복음 3장 1-21절: 위로부터 태어나다”

  1.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했던 시절을 상기해보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로 얻어지는 구원을 받아들이며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물같은 성령에 힘 입어 아담으로 부터 쌓온 모든 불의와 혈기를 주님 앞에 내어놓으며 물과 성령으로 씻어졌음을 인정하며 다시 태어난 삶을 주님의 반석위에 올려봅니다, 주님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시고 겸손과 온유로 주님의 길을 따라가기를 기도합니다.
    우크라이나로 인한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지도자들에게 혜안을 주시고 평화속에서 행복을 추구해 나가도록 이끌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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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주님! 아직도 내 마음속에 남아 있는 혈기, 분냄, 교만을 성령의 불로 태우사 겸손하고 자비와 사랑으로 다시 채워 주시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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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혼자서 일어서서 고개를 들고 천국을 볼수 없는 초라한 인생입니다.
    너무나 크고 무거운 죄짐을 지고서 어두움에서 방황 했습니다. 은총
    으로 중한 죄짐을 대신 지신 주신 주님의 사랑에 감사를 드립니다.
    몇주전에 세례 갱신을 하며 결심 했던 삶이 이웃과 더불어 은혜와
    사랑으로 계속되는 오늘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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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니고데모가 느꼈던 부족, 불만족, 괴리감…은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들입니다.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그 안에 갈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하나님을 알고 믿고 사랑하는데도 something is missing…이게 다일까, 이렇게 사는 것이 맞나, is this the best? is this all? 니고데모에게서 나를 봅니다. 믿음과 사랑의 시작이 나 자신에게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한 무거움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시 태어난다는 말씀은 매일 변화된다는 말씀과 다르지 않습니다. 교리나 신학이 중요하지만 믿음의 전부는 아닙니다. 하나님을 잘 믿기 위해서 성경을 펼치지만 성령의 감동이 없으면 활자로 된 단어들을 읽을 뿐입니다. 시작도 은혜, 과정도 은혜, 도착지도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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