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7장은 초막절에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앞에 기록된 오병이어의 표적이 유월절 즈음에 일어났으니(6:4), 6장과 7장 사이에 6개월 정도의 시간적인 간격에 있습니다. “초막절”(2절)은 이스라엘 백성의 40년 광야 유랑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절기였습니다. 이 기간 동안 유대인들은 잎이 넓은 나뭇가지로 초막을 만들어 일 주일 동안 그곳에서 지내면서 조상들이 당했던 고난을 기억했습니다. 유대인 성인 남성들은 이 절기 동안에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떠났는데, 예수님의 동생들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도 예루살렘으로 가기를 권합니다(3절). 당시에 예수님은 유대 사람들의 반감 때문에 주로 갈릴리 지역에서 활동하셨습니다(1절).
그 사정을 모르고 있던 동생들은 탁월한 지혜와 능력을 가진 형이 갈릴리에서 썩고 있는 것을 안타까이 여겼습니다. “알려지기를 바라면서 숨어서 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4절)라는 말에서 형제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동생들은 예수님의 지혜와 능력이면 예루살렘에서도 얼마든지 통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에 드러내십시오”라는 말은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과시하여 유명세를 누리라는 뜻입니다. 이 지점에서 저자 요한은 형제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고 첨언 합니다(5절).
예수님은 동생들에게 “내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러나 너희의 때는 언제나 마련되어 있다”(6절)고 답하십니다. 여기서 헬라어 ‘카이로스’가 사용되었습니다. ‘카이로스’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때’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위해 사는 사람은 나설 때와 물러설 때를 분별하며 삽니다. 반면 자신의 욕망에 따라 사는 사람에게는 때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때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어느 때도 때가 아닙니다. 세상은 때를 분별하지 않고 그럭저럭 사는 사람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아무런 위험도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면, 사명을 따라 때를 분별하며 사는 사람은 세상이 미워합니다(7절). 자신들의 죄악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후 예수님은, 당신은 가지 않겠다고 하시면서 동생들에게 예루살렘으로 가라고 하십니다(8-9절). 하지만 동생들이 떠난 후 예수님은 혼자서 은밀히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10절).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으려 했던 것이 아니라 동생들과 함께 다니면서 당신을 드러내기를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에는 이미 예수님에 관한 소문이 퍼져 있었고, 그분에 대한 견해는 다양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에 대해 드러내 놓고 좋은 말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38년 된 병자를 안식일에 고쳐 주었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제거할 기회를 찾는 유대인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11-13절).
묵상:
동생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형님이 어떤 분인지를 드러내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내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러나 너희의 때는 언제나 마련되어 있다”(6절)고 대답하십니다. 예수님은 분명한 목적과 사명과 계획을 가지고 사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고 권력을 얻는 것은 그분의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보내신 목적을 이루는 것이 그분의 유일한 목적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에게 “때”는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나설 때와 물러설 때, 올라갈 때와 내려 올 때, 당신을 숨길 때와 드러낼 때를 늘 분별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때가 왔다 싶을 때 예루살렘에 가셨고, 때가 왔다 싶을 때 십자가에 오르셨습니다. 그렇게 사셨기에 그분은 마지막에 “다 이루었다”(19:30)라고 말씀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런 목적도, 사명도, 계획도 없이 사는 사람에게는 “때가 언제나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때를 분별할 이유도,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땡기는 대로 먹고, 끌리는 대로 가고, 말하고 싶을 때 하면 됩니다. 어제 아침 신문에서 어떤 사람이 “하고 싶은 말을 하면 처음에는 후련한데 시간이 지나면 찝찝해지고, 하고 싶은 말을 참으면 처음에는 답답한데 나중에는 잘 했다 싶어진다”고 쓴 것을 읽었습니다. 때를 분별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언제나 후회할 일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때가 언제나 마련되어 있다는 말은 아무 때도 때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때를 분별하지 않고 살다 보니 아무 때나 때가 되는 것이고, 그렇게 살다 보니 한 번도 때를 제대로 만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때를 분별하며 사는 사람의 마지막 말은 예수님처럼 “다 이루었다”는 것이 될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의 마지막 말은 버나드 쇼의 비문처럼 “그럭저럭 하다가 이렇게 될 줄 알았지”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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