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7장 14-24절: 겉모양과 속모양

해설:

일 주일 동안 지속된 초막절 중간 즈음에 이르자 잠행을 하시던 예수께서 성전 뜰에서 사람들을 모아 놓고 말씀을 가르치십니다(14절).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던 유대인들은 그분의 지혜에 놀랍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정식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는 것을 생각하며 의문에 빠집니다(15절). 예수님은 당신의 가르침이 당신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답하십니다(16-17절). 당신은 당신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당신을 보내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할 뿐이며, 그렇기에 자신 안에는 불의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18절).

그런 다음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물으십니다.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를 고친 것(5:1-9)이 모세의 율법을 어긴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들은 예수님을 의심하고 박해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희 가운데 그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19절)고 도전하십니다. 그들 자신도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죽이려 하고 있으니, 말이 되느냐는 질문입니다. 그러자 그 대화를 듣고 있던 군중이 “당신은 귀신이 들렸소.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한다는 말이오?”(20절)라고 반문합니다.

예수님은 “한 가지 일”(21절) 즉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를 고친 일로 인해 그들이 놀라고 있다고 지적하십니다. 예수님은 할례법의 전통을 사례로 삼아 그들을 몰아 부치십니다. 유대인 남자 아이는 태어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만일 8일째 되는 날이 안식일과 겹치면, 유대인들은 할례법을 지키느라고 안식일법을 어겼습니다(22절). 그 예를 드시면서 예수님은, 만일 안식일에 할례를 행할 수 있다면,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를 고치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느냐고 물으십니다(23절). 

그러면서 예수님은 “겉모양으로 심판하지 말고, 공정한 심판을 내려라”(24절)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서 11장 3절을 생각나게 합니다. 이것은 메시아에 대한 예언의 일부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이새의 뿌리에서 나올 메시아는 “눈에 보이는 대로만 재판하지 않으며, 귀에 들리는 대로만 판결하지 않는다”고 예언하십니다. 예수님은 그 기준을 모두에게 요구하십니다.

묵상:

예수님은 그 말씀과 행적을 통해 듣고 보는 이들에게 큰 의문을 안겨 주십니다. 그분의 고향 나사렛에서도 그랬고 예루살렘에서도 그랬습니다. 그분은 유대인들이 믿고 신뢰할 만한 교육이나 훈련을 받으신 적이 없습니다. 고향 나사렛 사람들은 그분을 목수 혹은 석공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말씀은 어떤 율법학자에게서도 느낄 수 없는 권위가 있었고, 그분의 행적은 과거에 보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는 그분이 누구이신지에 대한 의문이 퍼져 나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과거에 메시아를 자처하며 선동했던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고 했고, 어떤 사람들은 그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유대인들은 모순적인 두 가지 사실 앞에서 선택해야 했습니다. 하나는 그분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안식일법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이라면 믿을 수 없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그분의 말씀과 행적이 범상치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은 자신 안에 하나님이 계시고 자신이 하는 말과 행동은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불행하게도 그들은, 그분이 안식일법을 어기셨다는 사실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로 인해 그들은 그분을 불신 했고 배척 했으며 결국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그릇된 판단에 대해 책망 하시면서 “겉모양으로 심판하지 말고, 공정한 심판을 내려라”(24절)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도 그분의 말씀을 읽고 그분의 행적을 읽는 사람들은 의문을 가집니다. “과연 이분은 누구신가? 이분의 가르침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이분은 왜 이렇게 행동 하실까?” 기도 중에 이 질문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분은 과연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오셨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겉모양으로만 본다면 그분은 역사의 위인 중 하나로 보이겠지만, 속모양을 본다면 그분은 육신으로 입고 우리 가운데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5 responses to “요한복음 7장 14-24절: 겉모양과 속모양”

  1. 세상을 위하여, 그토록 귀중한 보좌를 버리시고 가장 낮은 자리로 오신 하나님의 독생자 이십니다. 온세상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 이십니다. 삼일만에 부활하신 전지전능하신 구원의 하나님이심을 고백합니다. 주님을 옳게 더많이 알기를 기도합니다. 온몸과 마음과 혼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의지하기를 원합니다. 그럴듯한 겉 모양보다 속 내용이 청결한 믿음이 필요합니다.이웃과함께 주님을 조금더 닮아가고 말씀에 순종하는 오늘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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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이사야 53장 2 절의 말씀 처럼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이 가장 낮은 곳에 오셔서 모든 인류를 구원 하신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그 예수님과 오늘도 동행 하기를 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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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Taekhwan - T.K. Lee Avatar
    Taekhwan – T.K. Lee

    분별하는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생각으로 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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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겉모양과 속모양을 구별하지 못하기에 겪는 어려움이 한 둘이 아닙니다. 사람은 정말 그 속을 알 수 없기에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드물게는 겪어봐도 모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코로나 방역지침이 완화되고 카운티와 시티의 감염율도 감소하면서 가게도 조금씩 코로나 체제에서 벗어나는 중입니다. 종업원도 예전 숫자로 늘려야해서 ‘help wanted’ 싸인을 붙여 놓았는데 잘 구해지지 않습니다. 코로나와 상관없이 사람을 새로 뽑는 일은 늘 어려운 일입니다. 겉으로 봐선 “멀쩡”하고 일을 잘 할 것 같은데 정작 시켜보면 영 아닌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은 우선 용모와 말입니다. 어떤 관계에서 봐야할 사람인가에 따라 기준은 더욱 늘어나지만 대통령 후보이든, 교회 사역자이든, 요거트 가게 종업원이든 시작은 용모와 말입니다. 용모는 생김새를 뜻하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복잡합니다. 미국 같은 사회에서 용모를 본다고 하면 오해 받기 쉽습니다. 신체조건이나 피부색 등 겉으로 보이는 것으로 미리 판단하는 것을 경계하라는 법적, 사회적 요구가 있습니다. 용모는 보이지 않는 속사람의 예고편과 같습니다. 물론 본영화는 그렇지 않은데 예고편만 그럴싸하게 만든 경우도 없지는 않겠지요. 용모 다음은 말인데 여기서 많은 부분이 걸러집니다. 말은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에게 동시에 영향을 미칩니다. 인터뷰 자리에 같이 있었어도 듣고 이해한 것이 다릅니다. 우리는 제각기 듣는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놓고 유대인들이 곤란해 합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예수님에 대한 여러 말이 오고 갔습니다 (12절)” 예수를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군중을 속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일반 사람은 유대 지도자들의 심기를 건드리기가 무서워 드러내놓고 예수님에 대해 말하지 못했습니다 (13절). 요새 말로 “샤이 지저스 shy Jesus” 지지자가 그때에도 많았던가 봅니다. 예수님의 용모나 말이 지도자들에게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겉에 보이는 것 너머를 보지 못하게 가리는 것은 우리에게서 비롯된 것이기 쉽습니다. 나의 배경과 신념, 기대 같은 것들이 찾는 것이 따로 있습니다. 찾는 것이 있기 때문에 보고 듣는 것이 다릅니다. 나는 예수님께 무엇을 바라고 있나.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나. 평생을 겪어본 예수님입니다. 설마 나도 유대 지도자들처럼 겉모양만 보고 판단하지는 않지요? 종교적인 틀 속에 예수님을 집어 넣고 나 좋을대로, 나 편한대로 대하는 것은 아니지요? 주님,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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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흑인을 무시하고 착취한 많은 백인들이 있었지만, 동시에 용기있게 그들의 편이 되어주고 법률적, 재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은 많은 백인들이 있었고 그들 도움이 작지 않은 역할을 하여 흑인인권운동이 성공한 것입니다. 피부색 하나만으로 한 사람에대한 평가를 게으르다, 범죄 가능성이 있다, 또는 타민족에 대해 거만하다, 기득권이다 라고 판단하는 것은 너무 성급하다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하나로 전체를 싸잡아서 나쁘다 좋다 말하기는 힘든것입니다. 전문직이나 학위의 권위를 유달리 무시하고 낮게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식과 실제경험이 그런 외적인 자격보다 더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합니다. 화려한 자격을 가진 사람중에 실력이 없는 사람도 물론 있지만 훌륭한 실력을 겸비한 사람도 많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가 공정하고 확대된 시각을 갖기 원합니다. 한 사람을 편협되게 판단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겉모습이 누추하다고 얕잡아보고 무시하지 않고 또 반면에 화려하다고 기죽거나 질투하지도 않으며 그대신 그의 배경과 인생을 이해하려하여 그의 행동과 인격을 가지고 판단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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