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초막절 마지막 날 성전에서 가르치신 다음 예수님은 올리브 산으로 가셔서 주무십니다(7:31-8:1). 다음 날 아침에 그분은 다시 성전으로 오십니다. 사람들이 몰려들자 그분은 다시 그들을 가르치십니다(2절). “앉아서 가르치셨다”는 말은 진지하게, 오랜 시간 동안, 차분히 말씀을 가르치셨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그렇게 예수님과 무리가 가르침에 몰두해 있을 때,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끌고 옵니다(3절). “간음”은 혼외정사를 가르킵니다. 현장에서 잡혔다면 상간남도 잡아 와야 했는데 그들은 여자만 데리고 옵니다. 상간남이 도망을 쳤는지, 아니면 남성 중심의 사고 방식 때문에 상간남은 봐 주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간음한 남녀를 모두 투석형에 처하게 되어 있습니다(레 20:10; 신 22:22-24). 그들은 그 여인을 무리 가운데 세우고 예수님께 고발하며 처분을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4-5절).
저자 요한은 그들이 이렇게 한 것은 예수님을 고발하기 위함이었다고 적어 놓았습니다(6절). 그 여인을 율법 대로 처형 하라고 하면,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나는, 그것은 로마의 주권에 대한 도전이 됩니다. 로마 총독 관할 지역에서 사형 결정권은 총독에게만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위배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따라서 그 여인을 처형하라고 말씀하신다면 당신 자신의 가르침을 부정하시는 것이 됩니다. 만일 그 여인을 살려 주라고 말한다면 율법을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율법에 열성인 유대인들이 그분에게 등을 돌릴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무 말 없이 몸을 굽혀 땅바닥에 무엇인가를 쓰십니다(6절). 군중의 성난 감정이 누그러지기를 기다리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다그쳐 묻자 예수님은 일어나셔서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7절)고 말씀하시고 다시 앉으셔서 계속 쓰십니다(8절). 그러자 “나이 많은 이로부터 시작하여”(9절) 하나씩 떠나갑니다. 이로써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 했던 그들의 계략이 수포로 돌아갑니다. 얼마 지나자, 예수님과 그 여인만 남습니다. 예수님은 일어나셔서 그 여인에게 “너를 정죄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느냐?”(10절)고 물으십니다. 그 여인이 “주님, 한 사람도 없습니다”라고 답하자 예수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신 다음,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11절)고 당부하십니다.
(이 본문은 꺽음쇠로 묶여 있습니다. 난외주에 보면 “가장 오래된 사본들에는 7:53-8:11이 없음. 사본에 따라 7:36 다음에 이어지기도 하고, 21:25 다음에 이어지기도 함”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요한 저자가 쓴 원본에는 이 본문이 없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이 이야기의 신뢰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 이 본문이 사본마다 위치가 달라졌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매우 유명한 이야기였음에 분명합니다.)
묵상:
우리의 눈은 바깥으로 향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잘못은 잘 보는 반면 자신의 허물은 잘 보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에게 있는 불의에 대해서는 인식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불의를 비판하고 공격합니다. 자의식(self-righteousness)이 강한 사람들일수록 그런 경향이 강합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부지런히 율법을 연구하고 철저하게 지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그들의 자의식은 매우 높았습니다. 그 높은 자의식이 자신들의 부정과 위선을 보지 못하게 만들었고 또한 다른 사람들의 불의와 부정을 비판하고 공격하게 만들었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 대한 대화를 통해 예수님은 그들의 자의식이 얼마나 거짓된 것인지를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땅바닥에 쓰신 글이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이었다고 추측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십계명을 쓰셨을 것이라고 추측 하기도 합니다. 어쨋거나 예수님의 의도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향해 있던 그들의 눈을 돌려 자신을 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행히도 그들은 자신들의 허위의식을 깨달았고, 그래서 나이든 사람들부터 하나씩 돌아갔습니다. 자신의 죄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돌을 던지고 싶은 사람이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권위 앞에서 차마 그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만듭니다. 우리 자신의 허물에 대해서는 너그러운 반면 다른 사람의 허물에 대해서는 야박하게 대하는 경향이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찌하여 너는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 7:3)고 물으셨습니다. 죄를 멀리하고 거룩하게 살려는 노력이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구실이 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