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는 이들이 있었습니다(30절). 그들에게 예수님은 “너희가 나의 말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들이다”(31절)라고 말씀하십니다. “머물러 있다”라는 개념은 15장의 포도나무 비유에서도 다시 강조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그분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그 말씀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그들은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그 진리가 그들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32절). 그분의 말씀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 그분에 대한 믿음은 유실되어 버립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뒤집으면 그들이 진리를 모르고 있으며 그로 인해 속박된 상태에 있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그 뜻을 알아 차리고 자신들이 아무에게도 종노릇한 적이 없다고 답합니다(33절). 그들은 정치적으로는 자유를 빼앗겼지만 영적으로는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뜻하신 것이 정치적 자유가 아니라 죄로부터의 자유라고 답하십니다(34절).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부하고 있지만 실은 죄의 종으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습니다(35-38절).
유대인들은 “우리 조상은 아브라함이오”(39절)라고 답합니다. 그들은 육신적인 혈통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지만 영적으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떠나 살고 있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면 예수님을 반대하고 미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40절). 예수님이, 그들이 그들의 아비가 한 일을 하고 있다고 하시자 자신들은 하나님만을 아버지로 섬기고 있다고 답합니다(41절). 예수님은 그들이 자신을 배척하고 죽이려 하는 것으로 보아 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고 답하십니다(42-43절).
이 지점에서 예수님은 유대인들로서는 참을 수 없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들의 아비는 악마이며 따라서 그 아비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디아볼로스'(“악마” 혹은 “마귀”)는 악한 세력의 통치자인 사탄을 가리킵니다. 사탄은 하나님을 떠나 그분의 진리를 거스르고 그분이 하시는 일을 방해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탄이 처음부터 “살인자”였고 “거짓말쟁이”이며 “거짓의 아비”라고 이름 짓습니다(44절).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진리를 그들이 믿지 않으니, 그들은 진리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아니라 거짓의 아비를 섬기고 있다는 뜻입니다(45-47절).
해설:
성경에서 ‘악마’ 혹은 ‘마귀’라는 단어를 만나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어릴 때부터 책에서 읽거나 들어 온 동화와 전설 혹은 신화를 생각합니다. 뿔이 달리고 눈에서 불꽃이 나오는, 험상궂게 생긴 영적 존재를 생각합니다. ‘귀신’이라는 단어를 만나면 혼자 있을 때 홀연히 나타나 놀래키고 사라지는 영적 존재를 생각합니다. 그것이 성경과 영적 세계를 오해하게 만듭니다.
성경에서 ‘악마’와 ‘마귀’는 동의어로서 악한 영적 세계를 통치하는 사탄을 가리킵니다. ‘귀신’과 ‘악령’이라는 말도 동의어로서 사탄의 통치 하에서 활동하는 영적 존재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사탄을 “거짓말쟁이”라는 말과 “거짓의 아비”라는 말로 부르심으로써 그의 본질을 폭로하십니다. 사탄과 악령은 눈에 보이거나 오감으로 감지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영적 존재로서 우리를 속여 진리를 떠나 거짓을 믿게 만듭니다. 진리를 떠나 거짓을 믿으면 결국 영원한 죽음에 이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탄을 “살인자”라고도 부르십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악한 영은 “우는 사자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아 다닙니다”(벧전 5:8). 자칫 방비를 풀고 있다 보면 사탄에게 속아 넘어가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을 떠납니다. 그러면 사탄의 종이 되고 죄에 속박 된 존재가 됩니다.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고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일입니다. 31절에 “머물러 있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메노’는 “붙들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붙들고 그 의미를 묵상할 때 진리를 깨닫게 되고,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로서 죄로부터 자유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들음”과 “깨달음”(43절)으로 가능합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깨달음에 이르려면 그 말씀을 붙들고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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