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예루살렘 성전 바깥을 지나 가시다가 예수님은 “날 때부터 눈먼 사람”(1절)을 보십니다. 그 때 제자들이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2절)라고 여쭙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한 사람이 당하는 불행은 그 사람의 죄에서 기인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유대인들이 그 사람에게 “네가 완전히 죄 가운데서 태어났는데도, 우리를 가르치려고 하느냐?”(34절)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경우에는 해석하기 어려워집니다. 당사자의 죄 때문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율법학자들이 자주 토론하는 주제 중 하나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생각이 궁금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3절)라고 답하십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의 불행을 보고 그 원인을 따지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알고 보면, 그것은 잔인한 일입니다. 그 사람의 불행에 마음 아파하고 어떻게든 그 불행을 해결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는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낮 동안에 해야 한다. 아무도 일할 수 없는 밤이 곧 온다”(4절)고 하십니다. 죽음 당하실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또한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5절)라고 하십니다. 눈멀어 빛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보게 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진리에 눈 어둔 사람들에게 빛을 보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다음, 예수님은 침으로 진흙을 개어 그 사람 눈에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십니다(6-7절). 말씀 만으로도 보게 하실 수 있었으나 이렇게 하신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진흙을 개는 행동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는 모습을 기억나게 합니다. 실로암 연못은 예루살렘 성 바깥에 흐르던 물줄기를 수로를 통해 예루살렘 성 안으로 끌어들여 만든 것입니다. 실로암이라는 이름은 “보냄 받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실로암 연못을 하나님에게서 보냄 받은 당신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기셨습니다. 그 눈먼 사람이 “보냄받은 물”로 씻어 보게 되는 것처럼, 진리에 눈먼 사람들도 “보냄받은 분”을 통해 보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당시 눈먼 사람들은 구걸하여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사람이 치유 받고 이웃 사람들에게 나타나자 혼란을 겪습니다. 한 사람을 식별하는 데 눈이 가장 중요합니다. 눈 멀었던 사람이 눈을 뜨니 그 사람을 알아보기 어려워졌던 것입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눈 멀었던 사람이 맞는다고 말합니다(8-9절). 이웃 사람들은 궁금하여 자초지종을 물었고, 그 사람은 일어났던 일을 설명 해줍니다(10-11절). 그러자 그들은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묻습니다. 하지만 눈을 뜬 후에 예수님을 본 적이 없으니 그 사람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12절).
묵상:
구약성경은 ‘권선징악의 하나님’을 가르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진리와 정의의 하나님이시기에 인간의 행실에 대해 그분의 절대적인 기준에 따라 판단하시고 처분하십니다. 크게 보아 우리의 하나님은 ‘권선징악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에 대해 사사건건 판단하시고 그에 따라 상을 주거나 벌을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자애로운 부모가 자녀의 성장을 지켜 보면서 큰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잘못과 실수를 참고 보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의 사랑과 돌봄의 울타리 안에 있는 한, 자녀는 그 과정을 통해 건강한 성인으로 자라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하나님도 당신의 자녀들이 때로 범하는 잘못과 실수를 마음 졸여 지켜 보십니다. 헬리콥터 부모처럼 밀착하여 간섭하고 참견하고 잔소리 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야만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당하는 불행과 아픔이 모두 하나님의 징벌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주시는 징계로서의 불행도 있습니다. 하지만 절대 다수의 불행(장애, 질병, 갈등, 상실, 결핍 등)은 우리의 죄에 대해 하나님이 주시는 징벌이 아닙니다. 인간의 죄성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불행도 있고, 우리의 잘못이나 실수로 인해 자초하는 불행도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어려움을 만날 때 우리는 먼저 하나님 앞에 머물러 앉아 정직하게 우리 자신을 돌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의 매인지, 내 부족함으로 인해 자초한 것인지, 아니면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고난인지를 분별하고,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 들여야 합니다.
반면, 다른 사람의 불행을 대할 경우에는 그 이유를 따져 묻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그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서 해결해야 할 일입니다. 다만, 그 사람이 당하고 있는 불행을 줄여주고 그 불행을 감당하고 이겨낼 수 있도록 돕는 데 마음을 써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통해 하시려는 “하나님의 일”(3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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