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9장 1-12절: 하나님이 하시는 일

해설:

예루살렘 성전 바깥을 지나 가시다가 예수님은 “날 때부터 눈먼 사람”(1절)을 보십니다. 그 때 제자들이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2절)라고 여쭙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한 사람이 당하는 불행은 그 사람의 죄에서 기인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유대인들이 그 사람에게 “네가 완전히 죄 가운데서 태어났는데도, 우리를 가르치려고 하느냐?”(34절)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경우에는 해석하기 어려워집니다. 당사자의 죄 때문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율법학자들이 자주 토론하는 주제 중 하나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생각이 궁금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3절)라고 답하십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의 불행을 보고 그 원인을 따지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알고 보면, 그것은 잔인한 일입니다. 그 사람의 불행에 마음 아파하고 어떻게든 그 불행을 해결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는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낮 동안에 해야 한다. 아무도 일할 수 없는 밤이 곧 온다”(4절)고 하십니다. 죽음 당하실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또한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5절)라고 하십니다. 눈멀어 빛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보게 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진리에 눈 어둔 사람들에게 빛을 보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다음, 예수님은 침으로 진흙을 개어 그 사람 눈에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십니다(6-7절). 말씀 만으로도 보게 하실 수 있었으나 이렇게 하신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진흙을 개는 행동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는 모습을 기억나게 합니다. 실로암 연못은 예루살렘 성 바깥에 흐르던 물줄기를 수로를 통해 예루살렘 성 안으로 끌어들여 만든 것입니다. 실로암이라는 이름은 “보냄 받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실로암 연못을 하나님에게서 보냄 받은 당신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기셨습니다. 그 눈먼 사람이 “보냄받은 물”로 씻어 보게 되는 것처럼, 진리에 눈먼 사람들도 “보냄받은 분”을 통해 보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당시 눈먼 사람들은 구걸하여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사람이 치유 받고 이웃 사람들에게 나타나자 혼란을 겪습니다. 한 사람을 식별하는 데 눈이 가장 중요합니다. 눈 멀었던 사람이 눈을 뜨니 그 사람을 알아보기 어려워졌던 것입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눈 멀었던 사람이 맞는다고 말합니다(8-9절). 이웃 사람들은 궁금하여 자초지종을 물었고, 그 사람은 일어났던 일을 설명 해줍니다(10-11절). 그러자 그들은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묻습니다. 하지만 눈을 뜬 후에 예수님을 본 적이 없으니 그 사람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12절). 

묵상:

구약성경은 ‘권선징악의 하나님’을 가르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진리와 정의의 하나님이시기에 인간의 행실에 대해 그분의 절대적인 기준에 따라 판단하시고 처분하십니다. 크게 보아 우리의 하나님은 ‘권선징악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에 대해 사사건건 판단하시고 그에 따라 상을 주거나 벌을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자애로운 부모가 자녀의 성장을 지켜 보면서 큰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잘못과 실수를 참고 보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의 사랑과 돌봄의 울타리 안에 있는 한, 자녀는 그 과정을 통해 건강한 성인으로 자라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하나님도 당신의 자녀들이 때로 범하는 잘못과 실수를 마음 졸여 지켜 보십니다. 헬리콥터 부모처럼 밀착하여 간섭하고 참견하고 잔소리 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야만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당하는 불행과 아픔이 모두 하나님의 징벌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주시는 징계로서의 불행도 있습니다. 하지만 절대 다수의 불행(장애, 질병, 갈등, 상실, 결핍 등)은 우리의 죄에 대해 하나님이 주시는 징벌이 아닙니다. 인간의 죄성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불행도 있고, 우리의 잘못이나 실수로 인해 자초하는 불행도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어려움을 만날 때 우리는 먼저 하나님 앞에 머물러 앉아 정직하게 우리 자신을 돌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의 매인지, 내 부족함으로 인해 자초한 것인지, 아니면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고난인지를 분별하고,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 들여야 합니다. 

반면, 다른 사람의 불행을 대할 경우에는 그 이유를 따져 묻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그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서 해결해야 할 일입니다. 다만, 그 사람이 당하고 있는 불행을 줄여주고 그 불행을 감당하고 이겨낼 수 있도록 돕는 데 마음을 써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통해 하시려는 “하나님의 일”(3절)입니다. 

4 responses to “요한복음 9장 1-12절: 하나님이 하시는 일”

  1. 먼저 빛이신 예수님을 온전히 보는 영적의 안경을 원합니다. 주님의 얼굴과 영광을 항상 보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주님과 항상 동행하며 십자가에서 쏟으신 피와 물로 더럽고 더러운 죄를 깨끗이 씻기를 기도합니다. 영의 눈이 밝아저 이웃과 함께 세상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빛이되시는 주님을 소개하는 오늘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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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길지 않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 인지를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나의 영의 눈과 귀를 열여주셔서 매 순간 순간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보아 말씀대로 순종 하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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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눈이 먼 소경과 같이, 마치 내 삶이 한치 앞을 보지 못하는 깜깜한 미래와 어둠 속에 있는 것 같습니다. 나의 영의 눈과 귀를 열고, 빛 되신 주님을 바라보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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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난생 처음 앞을 보게 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이 사람은 새 생명을 받았습니다. 타고 난 장애가 없어지는 것은 새로운 삶이 가능해지는 제 2의 탄생입니다. 본 어게인입니다. 이를 ‘보는’ 주변 사람들은 예수를 믿음으로써 일어나는 새 생명의 시작을 깨달았어야 합니다. 믿는 집안에서 태어났거나 어렸을 때부터 예수를 믿은 사람들은 중생의 의미가 상대적으로 약할 수 있습니다. 잘 알지 못하는 예정론을 오늘 본문에 적용해 묵상하려는 마음은 없습니다만 “하나님의 일을 그 사람의 생애를 통해 나타내기 위해서 (3절)”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예수님의 답변은 우리의 삶은 이미 정해진 코스를 갈 뿐이라는, 그래서 우리의 의지나 선택이 개입할 자리가 지극히 미미하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이 만남을 메타포로 읽으면 앞이 안 보이는 밤 같은 세상 길을 빛으로 비춰주시는 예수님이 중심이 됩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를 의지하면 여전히 보이지 않는 세상 길을 답답함이나 걱정을 뒤로 하고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특별한 뜻이 있어 태어났다고, 보내심을 받았다고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뒤서 나의 가는 길을 비춰 주신다고 마음의 눈으로 상상하라는 말씀으로 읽으면 새롭게 눈을 뜬 사람이 느꼈을 감격을 나도 느끼게 됩니다. 주님의 은혜로 전쟁이 그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부서진 도시와 마음에 주님 오셔서 빛이 되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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