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예수께서 세례 주시던 요단 강 건너쪽에 물러가 계시는 동안, 베다니로부터 사람이 왔습니다(3절). 베다니는 시온 산 동쪽 올리브 산에 있는 마을인데, 그곳에 사는 세 남매 마르다,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는 예수님께 특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5절). 예루살렘에서 활동하시는 동안에 예수님은 주로 그 집에 머물렀던 것 같습니다. 베다니에서 온 사람은 나사로가 심한 병에 걸렸다고 알립니다(1절). 빨리 와서 나사로를 병에서 건져 달라는 뜻이었습니다. 12장에 보면, 그의 누이 마리아가 주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씻어드립니다(2절). 요한 저자는 나사로를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3절)이라고 표현합니다. 예수님과 나사로는 각별한 우정을 나누는 사이었다는 뜻입니다.
나사로가 중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병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4절)라고 말씀하시고는 그곳에 이틀 더 체류하십니다(6절). 요한 저자는 “예수께서는 마르다와 그의 자매와 나사로를 사랑하셨다”(5절)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그들에 대한 예수님의 특별한 애정을 고려한다면, 예수님의 반응은 냉담해 보입니다. 나중에 보면, 그 사이에 나사로가 끝내 목숨을 거둡니다.
이틀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유대 지방으로 가자”(7절)고 하십니다. 베다니로 가자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반대합니다(8절). 유대인들의 박해를 피해 나온 것이 얼마 전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아직은 밤의 때가 오지 않았으므로 괜찮다고 답하십니다(9-10절). 그런 다음 그분은 유다로 가는 이유를 밝히십니다. 나사로를 깨우기 위함이라고 하십니다(11절). 그가 이미 죽은 것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14절). 하지만 제자들은 잠자는 사람을 깨우러 갈 필요가 있는지 반문합니다(12-13절). 예수님은 그들의 오해를 고쳐 주시며, 당신이 그곳에 있지 않은 것이 오히려 잘 된 일이라고 하십니다(14-15절). 도마는 예수께서 유대인들과 결전을 벌이러 가시는 줄로 오해하고는 “우리도 그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말하며 따라 나섭니다(16절).
묵상:
예수님은 나사로의 상태가 위중 하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동안 세 남매가 당신에게 보여 주었던 사랑과 존경과 여러 가지 배려를 생각하면 그 소식을 듣는 즉시 달려 가셔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일견 냉담해 보이는 태도로 일관하십니다. 한 시가 급한 상황인데도 이틀을 더 그곳에 머무르셨습니다. 피치 못할 일이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로 인해 결국 나사로는 숨을 거둡니다. 나중에 마르다는 예수님을 만나 “주님, 주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21절)라고 말합니다. 예의를 지키느라고 애쓴 흔적이 보입니다. 실제로는 “주님, 왜 이제 오셨나요? 좀 더 일찍 서두를 수 없으셨나요?”라고 투정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에게는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분의 계획을 제자들도, 마르다와 마리아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제자들은 오해 했고 마르다는 서운함을 가졌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보고 제자들 처럼 오해 하기도 하고 마르다 처럼 서운하게 느끼기도 합니다. 때로는 분노하여 항의하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면, “아, 그래서 그러셨구나!” 하고 깨닫게 됩니다. 끝내 해결되지 않은 질문이 있다면, 바울 사도가 말한 대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할 때 환히 드러날 것입니다(고전 13:12). 우리는 그 때 그 때 일어나는 일로 하나님의 사랑의 여부를 판단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선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다만, 우리가 그분의 속마음 혹은 큰 계획을 모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하신 말씀 그대로입니다.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오직 나만이 알고 있다. 내가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재앙이 아니라 번영이다. 너희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려는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렘 29:11).
그것을 미리 알면 참 좋겠지만, 그렇게 되면 마치 결말을 아는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재미가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이해할 수 없는 분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분을 믿고 살다 보면 그분의 놀래킴에 전율하곤 합니다. 그것이 믿고 사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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