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장 1-16절: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

해설:

예수께서 세례 주시던 요단 강 건너쪽에 물러가 계시는 동안, 베다니로부터 사람이 왔습니다(3절). 베다니는 시온 산 동쪽 올리브 산에 있는 마을인데, 그곳에 사는 세 남매 마르다,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는 예수님께 특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5절). 예루살렘에서 활동하시는 동안에 예수님은 주로 그 집에 머물렀던 것 같습니다. 베다니에서 온 사람은 나사로가 심한 병에 걸렸다고 알립니다(1절). 빨리 와서 나사로를 병에서 건져 달라는 뜻이었습니다. 12장에 보면, 그의 누이 마리아가 주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씻어드립니다(2절). 요한 저자는 나사로를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3절)이라고 표현합니다. 예수님과 나사로는 각별한 우정을 나누는 사이었다는 뜻입니다. 

나사로가 중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병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4절)라고 말씀하시고는 그곳에 이틀 더 체류하십니다(6절). 요한 저자는 “예수께서는 마르다와 그의 자매와 나사로를 사랑하셨다”(5절)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그들에 대한 예수님의 특별한 애정을 고려한다면, 예수님의 반응은 냉담해 보입니다. 나중에 보면, 그 사이에 나사로가 끝내 목숨을 거둡니다. 

이틀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유대 지방으로 가자”(7절)고 하십니다. 베다니로 가자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반대합니다(8절). 유대인들의 박해를 피해 나온 것이 얼마 전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아직은 밤의 때가 오지 않았으므로 괜찮다고 답하십니다(9-10절). 그런 다음 그분은 유다로 가는 이유를 밝히십니다. 나사로를 깨우기 위함이라고 하십니다(11절). 그가 이미 죽은 것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14절). 하지만 제자들은 잠자는 사람을 깨우러 갈 필요가 있는지 반문합니다(12-13절). 예수님은 그들의 오해를 고쳐 주시며, 당신이 그곳에 있지 않은 것이 오히려 잘 된 일이라고 하십니다(14-15절). 도마는 예수께서 유대인들과 결전을 벌이러 가시는 줄로 오해하고는 “우리도 그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말하며 따라 나섭니다(16절).

묵상:

예수님은 나사로의 상태가 위중 하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동안 세 남매가 당신에게 보여 주었던 사랑과 존경과 여러 가지 배려를 생각하면 그 소식을 듣는 즉시 달려 가셔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일견 냉담해 보이는 태도로 일관하십니다. 한 시가 급한 상황인데도 이틀을 더 그곳에 머무르셨습니다. 피치 못할 일이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로 인해 결국 나사로는 숨을 거둡니다. 나중에 마르다는 예수님을 만나 “주님, 주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21절)라고 말합니다. 예의를 지키느라고 애쓴 흔적이 보입니다. 실제로는 “주님, 왜 이제 오셨나요? 좀 더 일찍 서두를 수 없으셨나요?”라고 투정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에게는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분의 계획을 제자들도, 마르다와 마리아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제자들은 오해 했고 마르다는 서운함을 가졌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보고 제자들 처럼 오해 하기도 하고 마르다 처럼 서운하게 느끼기도 합니다. 때로는 분노하여 항의하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면, “아, 그래서 그러셨구나!” 하고 깨닫게 됩니다. 끝내 해결되지 않은 질문이 있다면, 바울 사도가 말한 대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할 때 환히 드러날 것입니다(고전 13:12). 우리는 그 때 그 때 일어나는 일로 하나님의 사랑의 여부를 판단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선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다만, 우리가 그분의 속마음 혹은 큰 계획을 모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하신 말씀 그대로입니다.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오직 나만이 알고 있다. 내가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재앙이 아니라 번영이다. 너희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려는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렘 29:11).  

그것을 미리 알면 참 좋겠지만, 그렇게 되면 마치 결말을 아는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재미가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이해할 수 없는 분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분을 믿고 살다 보면 그분의 놀래킴에 전율하곤 합니다. 그것이 믿고 사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4 responses to “요한복음 11장 1-16절: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

  1. 아주 보잘것없고 더럽고 악취가나는 인생을 사랑하신다는 주님의 말씀을 이해할수 없지만 그귀한 말씀을 꼭 붙잡을수 밖에는 대안이 없습니다. 나사로의 죽음을 보고 모든것을 내려놓고 주님안에서 죽기를 원합니다. 십자가 사건을 통해 부활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어둠밤이 오기전에 시간에 이웃과함께 은혜의 하나님을 세상에 전하는 오늘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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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인간이기에 많은 기적을 보고 경험 하였지만 기억하지 못하고 에수님의 행하시는 일에 따르지 못하는 제자들의 무지 함이 나의 무지 함이 아닌가요? 주님! 성령께서 내 마음의 왕으로 오셔서 주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므로 그 깊은 뜻을 전하는 하루가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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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Taekhwan - T.K. Lee Avatar
    Taekhwan – T.K. Lee

    오늘 본문 말씀이 꼭 제 상황을 대변하는 듯합니다. 나사로가 죽어가는 시간이 얼마남지 않았고, 하루 빨리 예수님이 오시기를 바라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상황이 (21절 이후), 꼭 제 상황 같습니다. 이제는! 지금은! 하나님께서 간섭해주시고, 도와주셔야 하는 마지노선과 같은 상황에, 아무런 길이 보이지 않아서 답답하고 속상하고 서운합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수 있는 믿음과 인내를 허락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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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예수님과 제자들, 그 중에서도 도마 이 세 사람이 나누는 11장의 대화를 읽으면 우스개 표현으로 쓰는 ‘양로원 대화’가 따로 없구나 싶습니다. 귀가 잘 안 들리는 노인들이 모인 양로원에서 나누는 대화는 자기가 들은 것에 나름 성실하게 답을 해도 전혀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기가 쉽고, 이걸 들은 상대방은 상대방대로 또 자기 하던 말을 계속하거나, 새로 다른 이야기를 시작하거나…등등 앞뒤가 맞지 않는 대화의 연속이라는 뜻일 때 쓰는 말이랍니다. 본문을 놓고 노인은 커녕 젊은 사람들이 그것도 목숨이 위험하기도 한 상황에서 나누는 대화에 양로원 대화라는 표현을 붙이는 것이 송구스럽지만 그 정도로 11장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면서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답은 마치 나사로의 숨이 넘어가기를 기다리시는 것 같은 인상도 줍니다. 9절에서 낮이 열두 시간이나 되니 낮에 걸어다니는 것이 마땅하다는, 그래서 유대 땅으로 가자고 하시는 말씀도 수수께끼 같습니다. 빛이신 예수님이 계실 때,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볼 수 있을 때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 한다는 말씀 같기도 합니다. 나사로가 죽은 것은 유감이지만 제자들을 위해서는 다행이라는 15절의 말씀도 언뜻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것, 기도로 간구한 것에 대한 응답을 예스나 노, 두 가지로 나눕니다. 예스 응답은 내가 기대했던대로 되어지는 것, 원하는 결과를 원하는 시점에 받는 것이고, 노 응답은 (이것도 응답이라고 받아 들이기까지 시간이 걸리지만) 다른 뜻이 있어서 내가 원하는 것이 미루어졌거나, 이루어 지지 않음을 통해 또 다른 것을 깨우쳐 주심이라고 믿습니다. 나사로의 죽음은 이 두가지 외에 제3의 응답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줍니다.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 까지도) 가 원하는 기도 응답은 병을 떨치고 일어나 앉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체하는 이틀 동안 노 응답이 돌아왔습니다. 나사로가 숨을 거두자 두 자매는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슬픔 속에서 여러 감정을 느끼며 괴로운 중에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으면서 마음을 가라앉혔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의 결말은 나사로의 부활인 것을 압니다. 전혀 예기치 못한 새로운 일이 곧 일어날 것을 압니다. 나사로는 예수님의 부활의 예고편이고, 죽음의 주인,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만천하에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예스, 노 두 가지 시각에 묶여 있던, “감겨져 있던” 내면의 눈이 열리는 일을 주님은 보여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경험하게 하시고 싶은지 모릅니다. 오늘도 나는 내가 바라는 바를 주님께 알립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시리라고 믿으면서도 마음이 원하는 응답을 포기하지 못한 채 주님 앞에 나갑니다. 양로원 대화처럼 어긋나기만 하는 기도를 그치고 침묵과 순종의 마음으로 앉아 있으면 ‘너가 깊이 잠들었으니 깨워 주마’ 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지도 모릅니다. 주님, 귀를 열어 주시고 눈을 열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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