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예수께서 베다니에 도착 하셨을 때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난 뒤였습니다(17절). 예수께서 전갈을 받으셨을 때 이미 운명을 했을 것입니다. 그의 집에는 많은 사람들이 조문 와 있었습니다(18-19절). 예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듣자 마르다가 마중하러 나갑니다(20절). 누가복음에 나오는 이야기(10:38-42)에 의하면, 마르다는 마리아 보다 훨씬 활동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마르다는 “주님, 주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21절)라고 말합니다. 예의를 차려 말했지만, 속히 서둘러 오지 않으신 것에 대한 서운한 마음이 느껴집니다. 그러면서도 “그러나 이제라도, 나는 주님께서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하나님께서 다 이루어 주실 줄 압니다”(22절)라고 덧붙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표현한 것입니다. 하지만 죽은 오빠를 살려내실 것이라고 예상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네 오라버니가 다시 살 것이다”(23절)라고 답하십니다.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 그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내가 압니다”(24절)라고 응답합니다. 당시에 많은 유대인들이 마지막 날에 모든 의인들이 부활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께서 그것을 말씀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예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26절)고 물으십니다. 여기서 다시 “나는 … 이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그분이 부활이요 생명이신 이유는 그분이 하나님(I AM)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믿는다는 말은 영원하신 존재 안에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영원의 차원에 들어간 사람에게 죽음은 없습니다. 육신적인 죽음은 단지 상태의 변화일 뿐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헤아리지 못한 채로 “예, 주님! 주님은 세상에 오실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습니다”(27절)라고 고백합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마르다는 집으로 돌아갑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불러 오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28절). 마리아가 급히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달려가자 문상객들도 따라 나섭니다(29-31절). 예수님을 만난 마리아는 마르다와 같은 말로 서운함을 표시하면서(32절) 슬프게 웁니다. 예수님은 마리아가 우는 것을 보시고 “비통하여 괴로워하셨”(33절)습니다. 또한 그분은 나사로의 무덤에 이르러 눈물을 흘리십니다(35절). 그 모습을 보고 유대 사람들은 예수께서 나사로를 끔찍하게 여기셨다는 사실을 확인합니다(36절). 하지만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려내지 못한 까닭에 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37절).
묵상:
예수님이 우셨다는 기록은 성경에 세 번 나옵니다. 첫째, 그분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셨습니다. 둘째, 그분은 마지막 주간에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을 건너다 보시면서 우셨습니다(눅 19:40-41). 셋째, 그분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우셨습니다. 복음서에는 우셨다는 기록이 없지만 히브리서 저자는 그 사실을 전합니다(히 5:7, “예수께서 육신으로 세상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분께 큰 부르짖음과 많은 눈물로써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습니다.”). 세 번 모두 예수님은 당신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의 죄악과 그로 인해 당하게 될 불행한 운명을 생각하시며 우셨습니다. 기록 상으로 그러니, 실제로는 몇 번 더 우셨을지 모릅니다.
예수께서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시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두 가지로 해석했습니다. 한편에서는 “저분이 나사로를 끔찍히 아끼셨구나!”라고 생각했고(35절), 다른 한편에서는 “눈 먼 사람을 보게 하더니 죽은 사람을 살릴 수는 없나 보지? 그러니 저렇게 안타까이 우는 거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36절). 하지만 예수님은 그 전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26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다”(I AM)라는 표현으로써 당신이 하나님이라는 사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을 믿는 사람은 육신적인 목숨과 상관 없이 영원하다는 사실을 알리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신 것은 자신의 능력의 한계 때문도 아니고 나사로의 죽음 때문도 아니었음에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우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우셨던 다른 경우를 감안해 보면,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물질과 목숨이 전부인 줄 알고 눈이 어두워져서 당신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의 영적 어둠과 고집 때문이었을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기 전까지 모두가 겪어야 하는 죽음과 상실의 고통에 대한 연민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마음에 잔잔한 감동과 위로가 들어차는 것을 느낍니다. 우리의 주님은 하나님이시지만(I AM) 동시에 우리의 인간적인 한계를 아시고 마음 아파 하시고 때로 눈물 흘리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