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장 17-37절: 예수님의 눈물

해설:

예수께서 베다니에 도착 하셨을 때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난 뒤였습니다(17절). 예수께서 전갈을 받으셨을 때 이미 운명을 했을 것입니다. 그의 집에는 많은 사람들이 조문 와 있었습니다(18-19절). 예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듣자 마르다가 마중하러 나갑니다(20절). 누가복음에 나오는 이야기(10:38-42)에 의하면, 마르다는 마리아 보다 훨씬 활동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마르다는 “주님, 주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21절)라고 말합니다. 예의를 차려 말했지만, 속히 서둘러 오지 않으신 것에 대한 서운한 마음이 느껴집니다. 그러면서도 “그러나 이제라도, 나는 주님께서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하나님께서 다 이루어 주실 줄 압니다”(22절)라고 덧붙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표현한 것입니다. 하지만 죽은 오빠를 살려내실 것이라고 예상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네 오라버니가 다시 살 것이다”(23절)라고 답하십니다.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 그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내가 압니다”(24절)라고 응답합니다. 당시에 많은 유대인들이 마지막 날에 모든 의인들이 부활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께서 그것을 말씀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예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26절)고 물으십니다. 여기서 다시 “나는 … 이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그분이 부활이요 생명이신 이유는 그분이 하나님(I AM)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믿는다는 말은 영원하신 존재 안에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영원의 차원에 들어간 사람에게 죽음은 없습니다. 육신적인 죽음은 단지 상태의 변화일 뿐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헤아리지 못한 채로 “예, 주님! 주님은 세상에 오실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습니다”(27절)라고 고백합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마르다는 집으로 돌아갑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불러 오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28절). 마리아가 급히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달려가자 문상객들도 따라 나섭니다(29-31절). 예수님을 만난 마리아는 마르다와 같은 말로 서운함을 표시하면서(32절) 슬프게 웁니다. 예수님은 마리아가 우는 것을 보시고 “비통하여 괴로워하셨”(33절)습니다. 또한 그분은 나사로의 무덤에 이르러 눈물을 흘리십니다(35절). 그 모습을 보고 유대 사람들은 예수께서 나사로를 끔찍하게 여기셨다는 사실을 확인합니다(36절). 하지만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려내지 못한 까닭에 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37절).

묵상:

예수님이 우셨다는 기록은 성경에 세 번 나옵니다. 첫째, 그분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셨습니다. 둘째, 그분은 마지막 주간에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을 건너다 보시면서 우셨습니다(눅 19:40-41). 셋째, 그분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우셨습니다. 복음서에는 우셨다는 기록이 없지만 히브리서 저자는 그 사실을 전합니다(히 5:7, “예수께서 육신으로 세상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분께 큰 부르짖음과 많은 눈물로써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습니다.”). 세 번 모두 예수님은 당신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의 죄악과 그로 인해 당하게 될 불행한 운명을 생각하시며 우셨습니다. 기록 상으로 그러니, 실제로는 몇 번 더 우셨을지 모릅니다. 

예수께서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시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두 가지로 해석했습니다. 한편에서는 “저분이 나사로를 끔찍히 아끼셨구나!”라고 생각했고(35절), 다른 한편에서는 “눈 먼 사람을 보게 하더니 죽은 사람을 살릴 수는 없나 보지? 그러니 저렇게 안타까이 우는 거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36절). 하지만 예수님은 그 전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26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다”(I AM)라는 표현으로써 당신이 하나님이라는 사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을 믿는 사람은 육신적인 목숨과 상관 없이 영원하다는 사실을 알리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신 것은 자신의 능력의 한계 때문도 아니고 나사로의 죽음 때문도 아니었음에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우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우셨던 다른 경우를 감안해 보면,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물질과 목숨이 전부인 줄 알고 눈이 어두워져서 당신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의 영적 어둠과 고집 때문이었을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기 전까지 모두가 겪어야 하는 죽음과 상실의 고통에 대한 연민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마음에 잔잔한 감동과 위로가 들어차는 것을 느낍니다. 우리의 주님은 하나님이시지만(I AM) 동시에 우리의 인간적인 한계를 아시고 마음 아파 하시고 때로 눈물 흘리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6 responses to “요한복음 11장 17-37절: 예수님의 눈물”

  1. 주님을 믿으면 죽어도 산다는 도저히 이해할수없는 말씀을 꼭 붙잡고 기억하고 묵상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오랫동안의 기도가 내뜻대로 응답받지 못하더라도 주님께 섭섭한 마음을 버리고 신실 하시고 사랑의 주님을 항상 기뻐하고 쉬지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메시아 이시고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인류를 위해 그리고 처참한 십자기를 생각하시며 피와 땀을 흘리신 구원의 하나님을 이웃과 더불어 세상에 알리는 오늘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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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26절)라는 주님의 말씀이 나의 마음속에서 항상 게셔서 그 믿음이 변치 않게 하시고 영의 눈과 귀를 열어 주시므로 나와 온 인류를 위해 흘리시는 예수님의 눈물과 울음소리를 보고 들을 수 있도록 성령님께서 도와주시옵소서. 또한 주님이 부르시는 그 날까지 나사로의 삶처럼 덕을 세우는 자가 될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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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Taekhwan - T.K. Lee Avatar
    Taekhwan – T.K. Lee

    마리아와 마르다는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알고 있었습니다. 기적을 행하시고,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분이심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사로와 함께 있었다면, 분명한 기적이 일어났을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적과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분 뿐만 아니라, 죽음의 권세를 뛰어 넘어 예수님 자체가 부활이시며 생명이셨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마르다와 마리아는 또 다른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내 삶과 경험으로 만들어진 하나님만 믿는 것이 아닌, 내 이성과 경험 모두 뛰어넘어서 놀랍게 역사하시는 그 하나님의 계획과 은혜를 기대하고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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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께 하는 말이 똑같다는 데 눈길이 갑니다. “주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21절, 32절).” 이 말 속에는 예수님이라면 죽음을 막아 줄 수 있었을텐데…하는 아쉬움과, 이제는 너무 늦었다…하는 포기하는 심정이 같이 들어가 있습니다. 때 맞춰 오시지 않은 예수님을 탓하는 것은 아픔의 화살을 나 아닌 사람에게 겨누고 싶기 때문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성격이 다른 자매로 묘사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약간 다릅니다. 마르다와 예수님은 죽음 이후에 대해 말을 주고 받습니다. 예수님은 살아서 당신을 믿는 사람은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는 엄청난 선언을 하십니다. 마르다는 망서리지 않고 주님이 그리스도라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답합니다. 오빠의 죽음 앞에서 의연하고 담담한 모습을 봅니다. 예수님을 보는 순간 슬픔이 진정되었는지 모릅니다. 장례라는 큰 일을 치루는동안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자신을 추슬렀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좀 더 감정적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려” 말을 하는 모습부터 마르다와 다릅니다. 마리아가 몸으로 하는 말이 들리는 듯 합니다. 왜 이제 오셨어요, 오빠가 죽었습니다, 오빠가 많이 아팠습니다, 이제 우리만 남았어요, 예수님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과 이성적인 대화를 하고, 마리아는 감성적인 대화를 합니다. 대비가 된다기 보다 슬픔 앞에 서 있는 우리의 모습을 다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이 그리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태초부터 계신 분, 하나님과 같으신 분입니다. 나사로 세 남매의 아픔을 보고 우셨다는 것은 하나님도 우리의 일상과 그 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아신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보실 뿐 아니라 아시기도 하고 공감도 하신다는 뜻입니다. 마르다에게는 말로 공감해 주시고, 마리아에게는 눈물로 공감해 주신 예수님을 읽으니 내 마음도 진정이 됩니다. 공감과 소통이 모자라는 이 세상에 주님의 위로의 눈물이 떨어집니다. 주님을 믿기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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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내가 코로나로 정신이 피폐해지고 경제활동이 심한 타격을 받고 인간관계가 단절되었던 내 인생에 가장 힘들었던 그 순간에 어디서도 위안을 받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교회나 성도들에게서도 위로를 받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빼고 다 행복하고 경제적으로 윤택하고 은혜를 받는것처럼 보여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내게 보이는 위로와 친절이 다 가식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힘든 상황의 마르다가 느꼈던 서운하고 속상하고 억울한 감정은 이런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허전한 자리를 완벽히 채울수 있는 전지전능한 분이시고 세상 누구도 주지 못하는 위안을 주시는 분이심을 믿고 당신에게 의지합니다. 내 마음에 미움을 주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를 합니다. 용서할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나를 비웃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내게 평화와 위로를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세상의 근심을 뛰어넘는 것은 주님의 은혜 아니고 불가능합니다. 저를 구원하신 주님이여 환란속에 헤매는 저를 붙잡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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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오늘 나의 모습에도 예수님을 눈물 짓게 하는 영적 어두움과 고집이 있진 않은지 돌아봅니다. 내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아시는분은 그분이시기에 (15절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하셨지만 저는 마르다, 마리아처럼 내가 원하는 것이 좋은것인줄 알고 서운한 마음을 품을 때가 있습니다. 불쌍히 여겨주시며 제 생각에 눈물을 흘려주시는 사랑에 감사합니다. 웃음을 드리는 딸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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