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장 38-57절: 소생과 부활

해설:

팔레스타인에서는 시신을 땅에 묻지 않고 돌무덤에 안장했습니다. 그런 다음 짐승이 시신을 해치지 않게 하려고 돌판으로 입구를 막아 놓습니다(38절). 무덤 가까이 가신 다음 예수님은 무덤 문을 막아 놓은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마르다는 “주님, 죽은 지가 나흘이나 되어서, 벌써 냄새가 납니다”(39절)라고 답합니다. 예수님은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고, 내가 네게 말하지 않았느냐?”(40절)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돌을 옮겨 놓자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 “아버지, 내 말을 들어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41절)라고 기도하십니다. 그분은 이미 나사로를 살려 달라는 기도를 올리셨고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 주실 것임을 아셨다는 뜻입니다. 감사 기도를 드리는 이유는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믿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42절). 이렇게 기도하시고 나서 예수님은 “나사로야, 나오너라”(43절)고 큰 소리로 외치십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 잠시 후에 수의를 그대로 두른 채로 나사로가 걸어 나옵니다. 예수님은 “그를 풀어 주어서, 가게 하여라”(44절)고 말씀하십니다.

나사로의 부음을 듣고 문상하러 왔던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행하신 표징을 보고 그분을 믿게 되었습니다(45절). 하지만 그들 중 일부는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가서 그 사실을 알립니다(46절). 그들은 자치 의회인 산헤드린 공의회를 소집하여 예수님을 어찌할지에 대해 논의합니다(47절). 그들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있는 상황에 대해 염려합니다. 그 사실을 로마 총독이 알면 잔인하게 진압할 것이고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48절). 예수님 이전에도 스스로 메시아라고 주장하거나 사람들로부터 메시아로 추앙 받는 사람들이 나타날 때마다 로마 총독은 군대를 동원하여 잔인하게 진압했습니다. 

그 때, 대제사장이면서 산헤드린 의장이었던 가야바가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민족 전체가 망하지 않는 것이, 당신들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소”(50절)라고 말합니다. 그는 예수 한 사람을 제거하면 많은 사람들을 총독의 학살로부터 구할 수 있다는 뜻으로 말한 것입니다. 하지만 저자 요한은 가야바가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실을 예언하고 있다고 말합니다(51절). 즉 예수님 한 분의 희생으로 많은 사람이 구원받게 될 일을 예언한 것입니다. 저자는 계속하여, 예수님의 희생이 단지 유대 민족뿐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한데 모아서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예언한 것”(52절)이라고 설명합니다.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방인들을 말합니다. 

그 날로부터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모의하기 시작했습니다(53절).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 지방을 떠나 광야에서 가까운 지방인 에브라임 마을로 물러 가십니다(54절). 얼마 후, 유월절이 가까이 오자 사람들은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왔고 혹시나 예수님이 오시지 않을까 기대했습니다. 반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님이 나타나면 언제든 신고하도록 명령을 내려 두고 있었습니다. 어둠의 그림자가 바짝 다가왔습니다(55-57절).

묵상: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린 이야기는 복음서에 세 번 나옵니다. 한 번은 야이로의 딸을 살려 내셨고(막 5:21-43)또 한 번은 나인 성의 홀어머니의 아들을 살리셨습니다(눅 7:11-17). 야이로의 딸은 숨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살려냄을 받은 반면, 나인 성의 홀어머니의 아들은 숨진 지 며칠 후에 살려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장사 지내러 가는 행렬을 멈추고 살려 내셨으니 적어도 3-4일은 지났을 것입니다. 나사로 역시 숨진 지 나흘 뒤에 예수님에 의해 살림을 받았습니다. 그의 육신에 진행되고 시간의 흐름이 멈추어진 후에 되 감겨진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3차원 공간과 1차원 시간 안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3차원 공간과 1차원 시간을 넘어서 계셨던 예수님(I AM)께서 그들 의 삶에 개입 하셨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해 목숨의 차원 너머에 있는 생명을 보게 하십니다. 물질 세계를 넘어서는 영적 세계를 보게 하십니다. 3차원 공간과 1차원 시간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차원을 보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눈을 떠서 그 차원을 보게 하시고 믿게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다니로 향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이 일로 말미암아 너희가 믿게 될 것이다”(15절)라고 하셨고, 무덤 앞에서 기도하실 때도 “그들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42절)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나사로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다시 살려내신 표적은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보냄 받은 분이라는 사실을 믿게 하고, 그 믿음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고 의도된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살림을 받은 야이로의 딸도, 나인 성의 청년도, 나사로도 결국 다시 죽었습니다. 예수께서 진정으로 바라신 것은 물질 세계에서 육신적으로 건강하여 물질 축복을 누리는 데 있지 않고, 그분을 믿고 하나님 나라에 눈 뜨고 그 나라에 들어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 있습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희망은 소생이 아니라 부활에 있습니다. 

4 responses to “요한복음 11장 38-57절: 소생과 부활”

  1. 믿음의 기폭이 너무 심합니다. 주님의 영광을 본것은 너무나 짧은 순간이고 오래전입니다. 대부분의 시간은 회의와 위선으로 사는 가련한 존재입니다. 항상 주님을 향해 초점을 마추어 말씀에 순종하며 주님 닮아가는 삶을 살아내는 결단을 원합니다. 주님의 얼굴과 영광을 보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온세상의 죄를 지시고 온 인류를 살리시려고 십자가를 지신 구세주를 이웃과함께 세상에 알리는 오늘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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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사람의 생명을 살리시는 기적을 일으킬 때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이 위험을 알면서도 담대 하게 죽은 자를 살림이 하나님을 믿게 하시는 것이라고 말씀 하십니다. 주님! 예수님을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심을 전하는 제가 되기를 되기를 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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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죽음이 흔해졌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의 숫자만큼이 죽음의 숫자인데, 코로나 2년을 겪으면서 죽음의 소식을 너무 자주 들었더니 언젠가는 일어나는 삶의 마침표라는 생각이 사치스럽게 느껴집니다. 지금은 우크라이나의 상황이 세계를 불안 속으로 몰고 가고 있어 죽음은 우리의 현실 속으로 불쑥 들어온 느낌입니다. 크리스찬으로 산다는 것은 크리스찬으로 죽는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다만, 사는 데는 나의 의지와 결단을 쓸 수 있지만 죽는 일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삶과 죽음에 특별한 인과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기에 한 사람의 삶을 보고 그의 죽음을 예측할 수도 없습니다. 크리스찬은 삶의 전부를 하나님께 드린 사람입니다. 생명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니 그분의 뜻이 내 삶 속에서 펼쳐진다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고백합니다. 주신 삶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충분히 맛보고 나누다가 때가 되면 가는 것입니다. 나사로가 살아난 뒤에 어떻게 살았는지, 나사로 뿐 아니라 예수님이 살리신 사람들, 육신과 마음의 병을 고쳐주신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성경은 말해 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삶의 큰 변화를 겪은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나사로를 살리신 일을 기점으로 예수님은 더욱 위험하게 됩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대놓고 예수의 제거 계획을 세웁니다. 예수님 당신의 죽음이 성큼 다가옵니다. 죽음을 생각하면 인생의 픽쳐가 조금 커지는 것 같습니다. 아직 낮일 때 걸어 다니게 하소서. 아직 훤할 때 주님을 따르게 하시고 빛이 없어 넘어지는 일이 없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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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나사로가 죽음에서 살아난 것을 목격한 가족과 제자들의 놀란 얼굴을 상상합니다. 그들은 이 엄청난 기적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예수와 하나님께 기쁨으로 찬양을 목청껏 불렀을 것입니다. 그들은 나사로와 예수의 부활이 서로 복선으로 연결되있음을 나중에 떠올리며 분명히 다시 한번 감격했을것입니다. 복음성가중에 ‘기뻐 외치며 주께 두손 들리, 춤을 추며 왕께 찬양해’ 라는 가사가 생각납니다. 만약 우리의 가장 사랑하는 부모, 형제, 친구가 죽어서 슬퍼했는데 살아났다면 그 기쁨이 어떨까요? 저라면 하루 종일 웃고 춤을 추었을것 같습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실수투성이인 우리에게 두번째 기회를 주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위대합니다. 어둡고 쓸쓸한 제사음악이나 장송곡보다 기쁨과 축제의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젊어서는 예수가 죽었다는 사실에 많이 집중했기때문에 그를 생각하면 너무나도 가슴이 아팠습니다. 이제는 눈물을 닦고 그가 살아나심을 기뻐하려고 합니다. 우리도 죄와 죽음에서 함께 살아났습니다. 제 마음이 이러한 감사와 기쁨으로 가득 차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일상생활의 작은 거슬림과 인간관계의 불편함까지도 그 행복함속에 완전히 녹아버리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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