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이 말씀을 하시면서 예수님은 “마음이 괴로우셔서”(21절) 그들 중 하나가 당신을 배신할 것이라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털어 놓습니다. 그분이 괴로워 하신 이유는 당신을 배반할 제자의 불행한 운명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그 말씀에 놀라 아무 말도 못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 바라볼 뿐이었습니다(22절). 그 때 베드로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 곧 “예수의 품에 기대어 앉은 이”(23절)에게 고갯짓을 하여 그게 누구인지 알아보게 합니다(24절). 그 제자가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25절)라고 귀속말로 여쭙자 예수님은 그에게 “내가 이 빵조각을 적셔서 주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26절)라고 답하시고는 유다에게 빵조각을 건넵니다. 그 때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27절)고 했습니다. 악마는 먼저 죄악에 대한 욕구를 우리 마음에 불어 넣고 나서 우리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지켜 보고 있다가 상황이 무르익으면 우리의 마음을 장악합니다.
예수님은 유다에게 “네가 할 일을 어서 하여라”(27절)고 말씀하십니다. 유다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지점으로 넘어갔습니다. 회개의 때가 이미 지나 버린 것입니다. 유다는 빵조각을 받고 나서 밖으로 나갑니다. 요한은 여기서 “때는 밤이었다”(30절)고 적어 놓았습니다. 그는 참 빛이신 예수님에게서 영원히 떨어져 나감으로써 영원한 어둠 안으로 들어 갔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죽음의 때가 시작되었음을 의미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이 무슨 뜻으로 그렇게 말씀하셨는지 알지 못했습니다(28-29절). 예수님의 품에 기대어 있던 제자만 알고 있었습니다.
유다가 밖으로 나가자 예수님은 “이제는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께서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다”(31절)고 말씀하십니다. “영광을 받는 것”은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고 또한 모든 인류를 죄악에서 구원하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아들의 영광이요 아버지의 영광입니다. 가룟 유다가 영원한 밤을 선택하여 떠나간 이상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미” 영광을 받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린 자녀들아”(33절)라고 말씀하십니다. 영적으로 볼 때 그들은 아직 어린이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제 곧 떠나 가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34절)고 부탁하십니다. 그분은 이 부탁을 “새 계명”이라고 부르십니다. 사랑의 계명은 율법에도 있었습니다(레 19:18). 그럼에도 “새 계명”이라고 부르신 이유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는 조건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절정을 이룬 그분의 사랑은 전에 없던, 완전한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도 그분처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35절)이라고 하십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을 것을 생각하시면서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33절)고 말씀 하시자, 베드로가 어디로 가시는지 다시 여쭙니다(36절). 예수님은 다시금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나중에는 따라올 수 있을 것이다”(36절)라고 답하십니다. 그 길은 바로 십자가의 길 즉 자기 희생의 길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아직 그 길을 걸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부활 승천 하신 후에 성령의 선물을 받고 나서 그들은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 갔습니다.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베드로는, “나는 주님을 위하여서는 내 목숨이라도 바치겠습니다”(37절)라고 답합니다. 이 말에 예수님은, 그가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당신을 부인하게 될 것이라고 답하십니다(38절).
묵상:
우리 모두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이 사랑입니다. 인간의 본질은 사랑하고 사랑 받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의 조상들은 진작에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람’과 ‘사랑’ 그리고 ‘삶’이 같은 어근에서 나왔다는 말은 인간 존재의 본질과 인생의 중심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또한 현대 심리학이 증언하는 사실입니다. 인간 됨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는 것은 절대적 요소라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진정한 사랑, 순수한 사랑, 다함 없는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 끝까지 변하지 않는 사랑을 갈구합니다. 그런 사랑이 없이는 우리의 존재는 만족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을 모릅니다. 사랑에 무능합니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사랑으로는 우리의 내적 갈망이 충족되지 않습니다. 그 사랑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에게 그 사랑을 맛보게 하셨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비우고 낮아져서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퍼 주는 사랑을 십자가에서 보여 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십자가 아래에서 우리는 비로소 내적 허기를 채울 수 있고 내적 갈증을 채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짝퉁 사랑을 버리고 진품 사랑을 행하게 만듭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께서 주신 사랑의 계명은 새롭습니다. 겉모습은 동일하지만 내용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예수님은 낮아지는 길, 섬기는 길, 자기 희생의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말은 그분이 앞 서 가신 길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처음에는 그 길을 알지도 못했고 걷지도 못한 것처럼, 우리도 그 길을 알지도 못하고 걷지도 못합니다. 참 사랑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을 구합니다. 끝까지, 조건 없이, 변함 없이 지속할 수 있는 사랑을 구합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주님의 걸으신 길에 서게 하고 걷게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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