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4장 15-31절: 또 다른 보혜사

해설:

예수님은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곧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15절)하신 다음,  “다른 보혜사”(16절)를 보내실 것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보혜사”는 “변호사”, “대변자” 혹은 “위로자”라는 의미입니다. 성령 곧 “진리의 영”(17절)을 가리키는 비유입니다. 성령은 믿는 이들과 함께 거하시면서 변호자로, 대변자로 혹은 위로자로 일하십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행 하셨던 일입니다. 그래서 “다른 보혜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당신 자신도 보혜사이셨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시 오시겠다고 하십니다(18절). 그분은 당신이 부활하실 것과 성령의 강림을 마음에 두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19절).  

“그 날”(20절)은 부활의 날과 성령 강림의 날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은 성령을 통해 믿는 이들에게 다시 오십니다. 그 때가 되면 “내가 내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또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알게 될 것”(20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하셔서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되고 그분과 하나되어 살아가게 하십니다. 인격적으로 하나가 된다는 말은 서로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서로 사랑하면 그 사람의 뜻을 행하게 됩니다(21절).

이 말씀을 듣고 있던 유다(가룟 유다와 동명 이인의 제자)가 “주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는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려고 하지 않으시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22절)라고 여쭙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말해도 소용이 없기 때문이라고 답하십니다(23-24절). 진실이 그렇습니다. 예수님께 마음의 문이 닫힌 사람들은 그분을 만날수록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들을수록 거부감과 분노와 증오만 커졌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한 번 보혜사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그분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며,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26절)이라고 하십니다. 그것을 믿는다면 예수님이 떠나시는 것으로 인해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27절)야 합니다. 오히려 세상 그 무엇으로도 흔들 수 없는 든든한 평안을 경험해야 옳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평화를 너희에게 남겨 준다.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27절)고 하십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라는 말씀을 하실 때 예수님은 당시 로마 제국이 선전하던 “팍스 로마나”(로마가 군사력으로 이룬 평화)를 마음에 두고 계셨을 것입니다. 

이 말씀으로 예수님은 이제 곧 일어날 일에 대해 그들의 마음을 준비시키십니다(29절). 29절의 “그 일”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일을 가리킵니다. 그는 “이 세상의 통치자가 가까이 오고 있다”(30절)고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의 통치자”는 사탄을 의미하기도 하고 세상의 권력자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사탄이 세상의 권력자를 이용하여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는 나를 어떻게 할 아무런 권한이 없다”(30절)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의 참 생명은 하나님 안에 있으므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신 다음 당신을 잡으러 오는 사람들을 향해 나아가십니다(31절).

묵상: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들에게 성령께서 함께 하십니다. 때로는 방언이나 예언 같은 은사를 통해 성령의 내주를 확인할 수 있지만, 그런 외적인 표시가 없어도 진실로 믿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성령이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성령을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 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고전 12:3)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실한 고백은 성령께서 이미 그 사람 안에 내주하고 계시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영적인 진실은 어떤 느낌이나 증상을 근거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믿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을 믿는다면, 지금 내가 성령의 손에 잡혀 있고 또한 내 안에 성령께서 활동하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은 내 안에 계신 성령을 통해 일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고 깨닫게 하며 또한 순종하도록 이끄십니다. 그 일을 위해 성령께서는 때로는 변호사로, 때로는 위로자로, 때로는 교사로 또 때로는 고발자로 우리를 위해 일하십니다. 

믿음은 능동태가 아니라 수동태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인생도 역시 능동태가 아니라 수동태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성령의 능력으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의 손에 사로 잡혀 살아가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이며 가장 행복한 삶입니다. 그분의 손에 잡혀 살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참된 안식과 만족을 얻고 든든한 반석 위에 섭니다. 믿음 안에서 얻는 이 평화는 이 세상 그 무엇도 흔들 수 없습니다. 걱정과 근심은 믿는 사람에게 어울리지 않는 감정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이 세상의 통치자는 우리에게 아무 일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몸은 죽일지라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이”(마 10:28)입니다. 우리는 몸과 영혼을 모두 살리시는 분의 손에 잡혀 있습니다. 그것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의 능력입니다. 

5 responses to “요한복음 14장 15-31절: 또 다른 보혜사”

  1. 참 사랑이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사랑 합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성령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에 이 새벽에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주님을 찬양하며 예배 드리게 하시니 참으로 감사하고 내 마음속에 기쁨이 넘칩니다. 그 기쁨을 가지고 나에게 주신 소명을 오늘 하루도 감당하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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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Taekhwan - T.K. Lee Avatar
    Taekhwan – T.K. Lee

    믿음은 성령님을 통해 이루시는 수동적인 행위임을 기억합니다. 살아계신 영, 진리의 영이 나와 함께 하시니 기쁨이 넘치는 하루입니다. 오늘도 그 성령님께 내 삶을 올려드리고, 그 진리가 원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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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이 아침 마음의 문닫은 모든 가족과 친구와 이웃을 위해 기도합니다. 당신의 능력으로 그들의 문을 열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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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어제 오후 늦게 코비드 백신 두번째 부스터 (네번째 주사)를 맞았습니다. 1시, 2시, 4시…에 깨어 진통제를 먹을까 말까 망서렸습니다. 주사 맞은 팔이 무겁고 등도 뻐근해서 잠을 통 잔 것 같지 않습니다. 5시 넘어 타이레놀을 먹고 한 시간쯤 지나니 어느 정도 풀린 기분입니다. 눈만 감고 있을 뿐 잠을 자는 것 같지 않은데 “예수님의 마지막 수업을 들어야 하는데…”하는 생각이 머리속에 한가득이어서 평소보다 늦은 시간에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너희를(우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로 다시 올 것이다 (18절)” 이 구절을 읽으면 눈물이 핑 돕니다. 시부모님마저 다 가셔서 남편도 나도 정말 고아가 된 지 5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일찍 엄마를 여의어 나는 고아라는 생각을 늘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내게 믿음은 능동적인 삶을 가능케 하는, 세상을 ‘이기는’ 힘과 능력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친구로 맞이 하고 나의 대변인, 보호자, 변호인처럼 보게 된 시점도 엄마를 여의고 난 뒤였습니다. 속사람은 전혀 성인이 아닌데, 미처 준비를 하지도 않았는데 세상이라는 무대로 나온 것 같은 심정으로 교회에 의지하고 말씀에 기대었습니다. 그런데 살면 살수록 믿음이 능동태가 아니라 수동태라는 해설 말씀이 내 입에서 나온 말처럼 느껴지게 되는 일들이 많아졌습니다. 내 의지나 계획이 꺾여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믿음은 나의 행동을 설명하는 단어가 아니라 나의 존재를, 내가 있는 자리를 뜻하는 단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믿음의 자리 아니면 자아의 전쟁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교훈이나 계명은 믿음의 스펙트럼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공부를 일부러 잘 못하려고 하는 학생은 없듯이, 예수님의 교훈과 계명을 지키지 않겠다고 의지적으로 마음을 먹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직 마음이 열리지 않았거나 자꾸 닫히는 사람은 있어도 하나님의 사랑을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사람은 없다고 믿(고싶)습니다. 그래서 나는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고 따르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으며 (능동/수동의 포인트가 아니라 마음의 풍향계라고 봅니다) 환경에 휘둘리지 않고 주님만 묵상하겠다는 결단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결심을 북돋아 주는 은혜가 보혜사라고 생각합니다. 늘 나중에서야 깨닫게 되고, 그것도 십분의 일도 안되는 미미한 깨달음일 때가 많지만 그런 깨달음이 없었던 때와 비교하면 그만큼은 주님께 가까이 간 것 아닐까요. 주님의 평안, 자신을 고아라고 생각하는 나에게 주님의 평안은 용서와 세컨 챈스로 다가옵니다. 같은 실수, 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지켜주는 신비한 능력으로서의 평안이 아니라, 부족하기 때문에, 세상이 나를 고아라고 얕잡아 보니까 나는 주님이 없으면 안된다는 간절함으로 보헤사가 오십니다. 지금 너무 많은 고아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따뜻하고 환한 방에서, 아프면 약을 먹고 조용히 말씀을 읽는 이 시간이 더할 수 없는 행복이며 사치로 느껴지는 시간을 살고 있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서로를 불쌍히 여기는 보혜사를 보내 주소서. 총을 내려놓는 날이 속히 오게 하소서. 죽음의 비구름을 거두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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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세상에서 Pax Romana 를 주장하며 전쟁만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Shalom 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주님께서주시는 Shalom 을 각사람에게 온세상에게—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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