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7장 1-5절: 영생과 영광

해설: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모든 말씀을 마치신 다음,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십니다. 이것을 ‘대제사장적 기도’라고 부릅니다.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 드린 기도라는 뜻입니다. 이 기도는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먼저 하나님과 당신 자신에 대한 기도(1-5절)를 올리시고, 그 다음 제자들을 위해 기도(6-19절) 하시고, 마지막으로 제자들을 통해 믿게 될 사람들을 위해 기도(20-26절) 올리십니다. 

하나님과 당신 자신을 위한 기도에서 예수님은 “때가 왔습니다”(1절)라고 하십니다. 그 때는 십자가에 달릴 때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는 것이 당신의 “영광”이라고 하십니다. 또한 그것을 통해 아버지 하나님이 영광 받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인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보여 주는 증거입니다. 그것을 깨닫는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그분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아들에게 심판자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모든 사람을 영생으로 이끌기 위함입니다(2절). 예수님은 앞에서(3:17) 당신이 오신 것은 심판하기 위함이 아니라 구원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영생에 대해 정의하십니다. 그것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3절)입니다. 히브리어의 “알다”는 지식적인 앎이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를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어 사랑의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 관계 안에 있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따라서 영생은 지금 이곳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믿음 안에서 경험하지만,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할 때면 영생은 완전한 현실이 될 것입니다. 그 영생의 길을 여시기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에 들려 올려져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맡기신 일을 완성하여, 땅에서 아버지께 영광을 돌렸습니다”(4절)라고 하십니다. 마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이미 완성하신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를 지려는 그분의 의지가 그만큼 견고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누리던 그 영광으로, 나를 아버지 앞에서 영광되게 하여 주십시오”(5절)라고 기도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으니, 이제는 다시 당신의 차원으로 높여 달라는 기도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삼위일체의 또 다른 증거를 봅니다. 예수님은 태초부터 계셨던 하나님이십니다.

묵상:

어떤 사람은 영생을 ‘영혼불멸’로 오해합니다. 육신은 썩어 없어지고 영혼만 영원히 존재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리스 사상이지 성경의 믿음이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영생은 죽은 후에 시작하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영원의 차원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서 믿음을 통해 시작됩니다. 육신을 가진 존재로서 하나님의 영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죽은 후에는 육신이 썩어 없어지고 영혼은 하나님 품에 안깁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다시 오셔서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때 우리의 영혼은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합니다. 그 때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신령하고 영원한 몸(고전 15:44)을 입을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추구하는 영광은 껍데기일 뿐이고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영원한 영광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태초부터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이 누리고 계시는 그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 믿음이며, 영생은 그 영광을 누리는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청했을 때(출 33:18) 하나님께서는 그를 바위 틈에 들어가게 하고 뒷모습만 보여 주셨습니다. 한계적인 인간으로서는 그 영광의 전모를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그 영광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고후 3:18).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우리는 그 영광의 전모를 보고 그 영광에 참여할 것입니다.

3 responses to “요한복음 17장 1-5절: 영생과 영광”

  1. 하나님의 영광을 기대하고 기도하고 기다립니다. 또한 십자가사건으로 보여주신 하나님의 영광을 묵상하며 오늘 하루도 영광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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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며칠 전 묵상에서 믿음은 능동이 아니라 수동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게 되는 것, 나의 의지를 이루는 데 믿음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마음과 방향이 믿음의 자리에 있는 것 자체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평생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어떤 개념, 키워드, 인물, 사건을 척척 설명할 수 있게 되지는 않습니다. 여전히 정리되지 않는 생각, 알쏭달쏭한 뜻, 수시로 오락가락 하는 의미를 붙잡고 묵상할 때가 많습니다. 영생이란 것도 커다란 물음표 가운데 하나입니다. 영적인 생명과 영원한 생명이라는 두 한자 뜻을 다 품는 단어일 것입니다.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답하는 것도 생각만큼 간단하지 않습니다. 살아 있음, 목숨을 유지함, 죽지 않음… 다 생명을 설명하지만 충분한 말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생을 ‘천국’에서 일어나는 일, 천국에서 살아가는 삶이라고 이해하면 천국이 아닌 지금 이곳에서 사는 삶에 믿음은 무슨 관계가 있나 하는 질문이 튀어 나옵니다. “한 톨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며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는 시인의 언어가 현실의 비루함을 깨뜨립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것, 만져지는 것 너머를 상상하게 도와줍니다. 상상 만으로도 이 세상의 족쇄에서 벗어납니다. 예수님의 기도에서 드러나는 영생은 영광의 삶이기도 합니다. 그 영광은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아버지와 함께 가지고 있던 영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태초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나 새 하늘과 새 땅의 새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같은 의미인지 모릅니다. 새로와진다는 것과 회복된다는 것도 같은 의미일 지 모릅니다. 구름 같은 영생이 먼지 같은 일상과 만나지는 지점은 이토록 찰나적인 시공인 것이지도 모릅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 이제야 겨자씨만큼 이해됩니다.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이 내게 오신 일, 이 일 속에 영광이 들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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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먼 지난날에 아주 순간적인 주님의 사랑과 기쁨과 평강을 맛본적이 있습니다. 너무도 오래전이라 체험도 기억도 희미 해저 갑니다. 우선 주님과 관계가 바로서고 새로워지기를 간구합니다. 그리고 가정에서 교회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바른관계를 맺는 믿음이 필요합니다.지금부터라도 온전한 영생과 영광을 이웃과 함께 소망하며 살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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