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유대인들의 압력에 밀린 총독 빌라도는 다시 관저로 들어가 병사들에게 명하여 예수님을 채찍으로 치게 합니다(1절). 당시 죄인에게 사용된 채찍은 가죽으로 되어 있었고 끝에 살갗을 파고 들게 만든 쇠고리가 붙어 있었습니다. 병사들은 그분께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로 관을 만들어 씌웁니다. 그분을 왕으로 분장시킨 것입니다. 그런 다음 손바닥으로 때리며 조롱합니다(2-3절).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눅 23:34)라는 주님의 기도가 생각나는 장면입니다. 그들은 참되고 영원한 왕을 알아보지 못하고 무참하게 조롱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참 후에 빌라도는 관저 바깥으로 나와 자신은 예수에게서 아무런 죄도 찾지 못하겠다고 유대인들에게 말합니다(4절). 그렇게 말한 다음, 그는 피투성이 몸에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을 데리고 나와 그들 앞에 세웁니다(5절). “보시오, 이 사람이오”라는 말은 그분의 초라한 행색을 보라는 뜻입니다. 그분은 어느 모로도 왕이라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대제사장들과 경비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칩니다(6절). 빌라도는, 자신은 빠질테니 그들끼리 알아서 하라고 제안합니다. 유대 자치 의회에는 사형을 집행할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총독을 압박합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을 자처하는 신성모독을 범 했는데, 그들의 율법(레 24:16)에 의하면 그것은 사형에 해당하는 중범죄라는 것입니다(7절).
그 말을 듣고 빌라도는 “더욱 두려워”(8절) 합니다. 당시 로마 사람들은 그리스 로마 신화의 영향을 받아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을 신으로 여겼습니다. 빌라도는 그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서 예수님을 끌고 다시 관저 안으로 들어가 “당신은 어디에서 왔소?”(9절)라고 묻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미 모든 것이 정해진 것을 아시고 침묵하십니다. 불안해진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자신에게는 그분을 죽일 권한도 있고 풀어줄 권한도 있다고 말하면서 가타부타 답을 하라고 요구합니다(10절). 예수님은,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자신을 어떻게 할 수 없다고 답하십니다(11절). 빌라도의 권세는 땅에 속한 것이고, 예수님의 권세는 하늘에 속한 것입니다.
빌라도는 순간 예수님의 말씀에서 신적 위엄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는 다시 관저 바깥으로 나와 유대인들에게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빌라도를 굴복시키기 위해 최후의 일격을 가합니다. 남겨진 역사 기록에 의하면 빌라도는 유대 총독으로 공을 세워 로마 황제가 되기를 꿈꾸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에게 가장 두려운 일은 로마 황제의 의심을 사는 일이었습니다. 빌라도의 정치적 야심을 잘 알고 있었던 유대인들은 예수를 놓아주면 황제에게 반역하는 셈이라면서 빌라도를 겁박합니다(12절).
결국 이 일에서 손을 떼려는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자 빌라도는 재판정에 섭니다(13절). 때는 유월절 준비일 즉 금요일 낮 열두 시쯤이었습니다(14절). 빌라도는 예수님을 유대인들에게 넘겨 주면서 “보시오, 당신들의 왕이오”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요구합니다. 빌라도가 “당신들의 왕을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말이오?”라고 묻자 대제사장들은 “우리에게는 황제 폐하 밖에는 왕이 없습니다”(15절)라고 답합니다. 하나님을 모독 했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요구 하면서 대제사장들은 최악의 신성모독을 범합니다. 그러자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허락합니다(16절).
묵상: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빌라도는 정치적인 야망가였습니다. 그는 당시 로마 제국 안에서 가장 통치하기 어려운 민족으로 소문난 유대 총독으로 부임 하면서 단숨에 그 민족을 장악하는 공을 세우려 했습니다. 그로 인해 그는 처음부터 유대인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고, 그는 더욱 잔인하게 유대 민족을 길들이려 했습니다.
복음서의 기록만 본다면, 빌라도는 예수님을 어떻게든 살리려고 노력한 양심가처럼 보이지만, 실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에 손상이 가지 않게 하려고 온갖 궁리를 다한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대면하면서 뭔가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권위감을 느꼈지만,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무시하고 외면했습니다. 그 자신이 말한 것처럼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예수님을 얼마든지 풀어줄 수 있었지만, 그 일로 인해 자신의 이력에 오점을 남기고 싶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넘겨 준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그분이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은 성경에 예언된 일입니다. 그것은 마땅히 일어나야 할 하나님의 섭리요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누가 악역을 맡느냐는 본인의 분별과 선택과 결단에 달린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욕망에 따라 악역을 맡게 된 유다에 대해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마 26:24)이라고 하셨습니다. 빌라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자신의 정치적 손실을 감수하고 예수님을 풀어 주었다면 하나님은 다른 방식으로 구원을 이루셨을 것입니다. 그가 악역을 택한 것은 그 자신의 죄성으로 인한 결과입니다. 따라서 그의 악행으로 인해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졌다고 해서 그의 죄가 용서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매일 지속되는 하나님의 구원의 드라마에 나는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나의 고집과 편견과 혈기로 인해 악역을 맡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가 또 다른 빌라도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개 숙여 하나님의 은총을 기도합니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