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9장 28-37절: 다 이루셨다

해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메시아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예언이 다 이루어진 것을 보시고 “목마르다”(28절)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시편 69편 21절에 나오는 예언(“배가 고파서 먹을 것을 달라고 하면 그들은 나에게 독을 타서 주고, 목이 말라 마실 것을 달라고 하면 나에게 식초를 내주었습니다”)을 생각하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 말을 듣고 사람들은 시편의 예언대로 신 포도주를 해면에 적셔서 그분의 입에 가져다 댑니다. 그들은 성경의 예언을 알지도 못하는데 그 예언을 따라 행동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으로 목을 축이시고 “다 이루었다”는 말씀과 함께 운명하십니다(30절). 당신을 통해 이루어야 할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었다는 뜻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사람들은 보통 2-3일 정도 고통을 겪다가 운명합니다. 일 주일 가까이 살아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린 지 세 시간 정도 지나서 운명하셨습니다. 그렇게 일찍 운명하신 이유는 사형 선고를 받고 심한 고문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까지 가는 것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기진해 있었습니다. 

그 날은 금요일 즉 안식일을 준비하는 날이었습니다. 그 안식일은 유월절을 시작하는 날이기도 했으므로 특별히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요한 저자는 “그 안식일은 큰 날이었다”(31절)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시신을 나무에 달아 놓으면 땅이 부정해 진다는 율법(신 21:22-23) 때문에 시신을 나무 위에 매달아 둔 채로 유월절을 지키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빌라도에게, 십자가에 달린 죄수들의 다리를 꺾어 죽음을 앞당겨 달라고 청합니다. 빌라도가 허락하자 병사들이 살아 있는 죄수들의 다리를 꺾습니다(32절). 하지만 예수님은 이미 운명 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33절). 그 대신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 죽음을 확인합니다(34절). 요한 저자는 이 지점에서 그것이 직접 본 목격자의 증언이라는 사실을 첨언 합니다(35절). 그것도 역시 성경(신 12:46; 슥 12:10)에 예언된 대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묵상:

요한 저자는 로마 병사가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창으로 옆구리를 찔렀고 그로 인해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는 사실을 전합니다. 그는 또한 그것은 현장을 목격한 사람의 증언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 목격자는 26절에 나오는 “사랑하는 제자” 즉 요한 저자 자신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이 사실을 이토록 강조한 데에는 적어도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요한이 이 글을 쓸 즈음에 예수님이 부활한 것이 아니라 실신 했다가 서늘한 돌무덤에서 회복되었다는 헛소문이 퍼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제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예수님이 부활 하셨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 두 가지의 레파토리를 주로 사용합니다. 하나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다가 숨겨놓고 날조 했다는 것(마 28:11-15)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실신 했었다는 것입니다. 요한 저자는 그분의 죽음을 자신이 직접 확인했다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예수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 하셨다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둘째, 요한이 이 글을 쓸 즈음에 하나님의 아들이 나사렛 예수의 몸을 잠시 빌려 쓰고 활동하다가 십자가에서 운명하기 전에 떠나셨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을 ‘영지주의자들'(the Gnostics)이라고 부르고, 그들의 가르침을 ‘가현설'(Docetism)이라고 부릅니다. 요한 저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사렛 예수의 몸을 탈처럼 쓰고 활동한 것이 아니라 온전한 인간이 되어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유혹과 고난을 겪으시고 죽으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이렇게 써 놓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하나님의 아들로서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셔서 성경의 예언을 따라 행하시고 그 예언을 따라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킴을 받으셨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우리의 죄를 해결해 주셨고, 부활하심으로써 영원으로 가는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6 responses to “요한복음 19장 28-37절: 다 이루셨다”

  1. 극심한 수모와 고초를 감당하신 후에 만유의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도 창으로 찔려 피와 물을 쏟으신 날을 저희들은 Good Friday(?)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안타까워 울어야할지 진심으로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진심으로 감사하며 이웃과함께 통곡하는 오늘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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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인해서, 우리의 모든 죄와 죽음의 문제를 구원시키심에 감사합니다. 이 진리와 복음이 내 삶을 통해서, 그리고 아직 믿지 않는 자들, 그 진리를 변형시키는 자들까지도 그 놀라운 은혜와 긍휼하심이 거하는 성 금요일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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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성경에 여러 등장인물이 등장하나 제한된 지면때문에 생략된 경우도 많을텐데, 네 절에 걸쳐서까지 등장하는 한 군인의 이야기가 제 시선을 끕니다. 이 사람이 굳이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예수님이 돌아가셨고 부활한 것이 아니라, 살아서 숨었다는 유대인의 집요한 공격과 음모가 분명히 있었을겁니다. 그 군인에 대해 더 알고 싶어서 영어성경을 읽어보니 그에대해 더 자세히 알게 되는 느낌입니다. 상처의 자세한 묘사와 그가 testimony 했다는 것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지금으로 보면 모든 국민이 보는 국회청문회 증인같았을까요. 당시 군인의 신분으로 이런 사건에서 testimony를 했다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이었을겁니다. 살해위협을 받았을지도 회유나 뇌물유혹을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단지 변방의 젊은 반역지도자의 죽음으로 생각했다면 거짓증인할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용감했고 정직했습니다. 빌라도와는 달랐습니다. 저는 그가 후에 어떤 사람이 되었을지 궁금합니다. 로마에서 사도들을 숨어서 도왔을까요. 저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대충 쓰시는 법이 없고 다 귀하게 쓰신 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길가에서 구걸하는 사람이나 허름하게 입은 손님을 업신여길수 없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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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성경에 여러 등장인물이 등장하나 제한된 지면때문에 생략된 경우도 많을텐데, 네 절에 걸쳐서까지 등장하는 한 군인의 이야기가 제 시선을 끕니다. 이 사람이 굳이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예수님이 돌아가셨고 부활한 것이 아니라, 살아서 숨었다는 유대인의 집요한 공격과 음모가 분명히 있었을겁니다. 그 군인에 대해 더 알고 싶어서 영어성경을 읽어보니 그에대해 더 자세히 알게 되는 느낌입니다. 상처의 자세한 묘사와 그가 testimony 했다는 것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지금으로 보면 모든 국민이 보는 국회청문회 증인같았을까요. 당시 군인의 신분으로 이런 사건에서 testimony를 했다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이었을겁니다. 살해위협을 받았을지도 회유나 뇌물유혹을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단지 변방의 젊은 반역지도자의 죽음으로 생각했다면 거짓증인할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용감했고 정직했습니다. 빌라도와는 달랐습니다. 저는 그가 후에 어떤 사람이 되었을지 궁금합니다. 로마에서 사도들을 숨어서 도왔을까요. 저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대충 쓰시는 법이 없고 다 귀하게 쓰신 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는 우리가 길가에서 구걸하는 사람이나 허름하게 입은 손님을 업신여길수 없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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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부활절을 앞둔 고난주간 중에는 기독교 신앙 관련 기사를 보통 때보다 많이 접하게 됩니다. 기존의 미디어 외에 인터넷 매체와 플랫폼이 많아진 요즘엔 검색을 따로 하지 않아도 뉴스처럼 올라오는 글들이 흔합니다. 어제 페북에서 세족 목요일 (Maundy Thursday) 에 있었던 유월절 식탁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다이애나 버틀러 배스 Diana Butler Bass 기독교 역사학자가 쓴 글이었는데 잡히시기 전에 제자들과 나눈 유월절 식탁과 부활 후에 두려워 숨어 있는 제자들 앞에 나타나신 것을 연결했습니다. 성금요일과 부활의 날로 이끄는 목요일의 사건이 아니라 제자들과 함께 한 식탁, 특별히 유월절의 의미를 되살리는 자리로서 목요일을 따로 설명하는 글이었습니다. 한국 신문에도 부활 신앙의 의미를 설명하는 목사님들의 글이 올라왔습니다.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지극히 인간적이고, 인간다운 일입니다. 의식적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우리는 매일 매순간 의미를 찾습니다. 의미가 반드시 설득력을 갖춰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게 의미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할 때가 많습니다. 오늘 10 줄 본문은 예수님의 죽음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운명하신 예수님에게 행해진 군인들의 행동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쓰여진 부분이 이들의 행동으로 실현되었습니다. 글이 사건으로 변했습니다. 군인들의 행동은 다시 글로 남아 읽는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줍니다. 예언의 성취는 의미의 발견으로 완성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 이루었다 It’s done…complete” 예수님의 이 말씀이 오늘 내게도 의미있는 선언이 되는가 묻습니다. 죽음의 순간에 들려진 말씀을 삶의 현장에서 되살리는 것은 믿는 사람의 몫입니다. 예수님의 순종이 세상에는 저항이 되고, 그분의 죽음이 세상에는 삶이 되는 십자가의 의미. 이 의미를 이어가는데 필요한 고백과 결단을 묵상하며 오늘을 지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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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은 참으로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고통과 그 과정은 하나님의 계획하시고 행하심을 깨닫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순종의 본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를 끝없이 사랑하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 명령에 순종 할 수 있는 굳은 믿음을 나에게도 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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