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십자가에 달린 사람들이 모두 숨을 거두자 유대인들은 시신들을 끌어 내립니다. 원래 십자가에 처형된 사람의 시신은 처형된 그 상태로 놓아 두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새들이 와서 시신을 쪼아 먹고, 부패하여 신체의 일부가 땅에 떨어지면 개나 짐승들이 뜯어 먹었습니다. 이것은 보는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주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로마 제국에 항거하는 사람들의 말로가 얼마나 비참한지를 보여 줌으로써 반역의 의지를 제거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요구에 따라 시신들을 십자가에서 내리되 그 자리에 내버려 두도록 지시했을 것입니다.
그 때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안장하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그는 “부자”(마 27:57)였습니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그는 “의회 의원”이었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막 15:43)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요한 저자는 그가 “예수의 제자인데, 유대 사람이 무서워서, 그것을 숨기고 있었다”(38절)고 말합니다. 아마도 그는 니고데모와 함께 산헤드린이 예수님을 사형으로 몰아가지 않도록 은밀히 애를 썼을 것입니다. 하지만 워낙 소수여서 막을 수 없었습니다. 요셉은, 이미 때는 늦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반역자로 십자가 형을 당한 사람의 시신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같은 혐의를 받을 수 있는 위험한 일이었지만, 요셉은 용기를 내어 빌라도를 찾아 갑니다.
빌라도는 요셉의 무모한 요구에 순순히 응합니다. 그가 보기에 예수님은 로마 정부에 반역을 꾀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받아오자 니고데모가 몰약에 침향을 섞은 것을 가져 옵니다(39절). 그들은 유대인들의 관례 대로 예수님의 시신에 향료를 넣고 삼베로 감아쌉니다(40절). 일몰(안식일이 시작되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서둘러 예수님의 시신을 동굴 무덤에 안치합니다. 돌무덤에 시신을 안치한 다음에는 도둑이나 짐승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큰 돌로 입구를 막아 놓습니다. 이로써 “그는 폭력을 휘두르지도 않았고, 거짓말도 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그에게 악한 사람과 함께 묻힐 무덤을 주었고, 죽어서 부자와 함께 들어가게 하셨다”(사 53:9)는 예언이 성취 되었습니다.
묵상:
“예수 믿으면 축복 받는다”는 말은 기독교 복음의 반쪽일 뿐입니다. 아니, 반에 반쪽도 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성령의 능력 안에 사는 것은 말할 수 없는 축복입니다. 하지만 그 축복을 경험하고 누리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예수의 제자로 살기를 힘씁니다. 예수의 제자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때로 손해를, 때로 미움을, 때로 모욕을, 때로 박해를 당할 수 있습니다. 믿는 것은 이 세상 사람들과 같은 목적을 향해 경쟁하는 과정에서 그들에게 없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목적으로 향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가는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갈 때가 있고, 모두가 “예” 할 때 “아니오”라고 할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희생과 고난을 감수해야 합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면서도 동료 산헤드린 의원들에게 미움을 살까 싶어 그 사실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만일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지지하고 옹호 했다면 그는 의원직을 잃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로부터 받고 있던 신망과 존경을 한 순간에 잃어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는 아직 그것까지 감당할 정도로 믿음이 깊지 못했습니다. 산헤드린에서 예수님에게 사형 판결을 내렸을 때 그는 속으로 가책을 느꼈을 것입니다. 침묵으로 그들의 악한 결정에 동조한 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죽음이 자신의 책임이라고 느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빌라도를 찾아가 예수님의 시신을 요구했습니다. 늦었지만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는 위험을 감수한 것입니다. 요셉은 제자로서 실패 했습니다. 하지만 그 실패가 디딤돌이 되어 더 강한 믿음으로 도약했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빌 3:10-11)는 바울의 고백이 생각 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 땅에서 축복 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 고난 받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거듭 되는 실패를 통해 자라고 견고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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