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그동안 우리는, 요한 저자가 다른 복음서 저자들과 동일한 사건을 전할 때, 그들이 주목하지 않은 이야기를 소개하는 경향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빈무덤에 대한 보도에서도 동일한 경향이 보입니다.
“주간의 첫 날 이른 새벽”(1절)은 오늘로 하면 일요일 새벽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오늘의 토요일)을 한 주일의 마지막 날로 여겼고, 일요일을 주간 첫 날로 여겼습니다. 안식일(금요일 일몰부터 토요일 일몰까지)에는 어떤 활동도 할 수 없었기에 막달라 마리아는 일요일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무덤에 가 보니, 무덤 입구를 막아 놓은 돌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 간 것으로 생각하고 급히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2절)에게 달려가 그 사실을 알립니다. 두 제자는 급히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무덤에 먼저 당도한 것은 “그 다른 제자”(4절)였는데, 그는 무덤 입구에 선 채 내부를 살펴 봅니다(5절). 반면 늦게 도착한 베드로는 무덤 안으로 곧장 뛰어 들어갑니다(6절). 여기서도 두 사람의 성격 차이가 보입니다. 두 사람은 예수님의 시신을 싸 맸던 삼베가 그대로 놓여 있고 머리를 싸 맸던 수건이 따로 개켜 있는 것을 봅니다(7절). 무덤 입구에 서 있던 “그 다른 제자”도 무덤 안으로 들어와 상황을 살펴 보고는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믿었다”(8절)는 말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다는 뜻이 아니라 여인의 말대로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믿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그것이 예수께서 부활 하셨다는 뜻인 줄 몰랐습니다. 그런 일이 있으리라는 성경의 예언(가령 시 16:10; 사 53:10-12; 호 6:2)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9절). 하지만 그들은 막달라 마리아가 추측한 대로 예수님의 시신을 도둑 맞은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도둑이 든 것이라면 꽤 값비싼 삼베를 그냥 두고 갔을 리가 없습니다. 또한 도둑 맞았다면 무덤 내부가 흩어져 있었을 것인데, 누군가가 정리해 놓고 간 것처럼 정돈 되어 있었습니다. 두 제자는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궁금해 하면서 있던 곳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묵상:
네 복음서는 모두 예수께서 고난 받으시고 죽임 당하시는 과정에 대해 세밀하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어떤 학자는 마가복음에 대해 “예수의 수난 이야기에 간단한 서론을 붙인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네 복음서 모두에게 진실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이야기를 기록 하면서 마지막 일 주일의 사건에 대부분의 지면을 할애한 것입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의 사건이 중요했다는 뜻입니다.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희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에 비하면 부활 사건에 대해서는 너무도 적은 지면을 할애합니다. 다른 복음서에 비하면 요한복음이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지만, 일곱장(13장부터 19장까지)을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 할애한 저자는 겨우 두장(20-21장)을 부활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들은 짧은 한 장으로 부활의 이야기를 정리합니다.
부활 사건이 십자가 사건에 비해 중요성이 떨어지기 때문이 아닙니다. 십자가 사건은 지상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목격한 사건입니다. 그렇기에 일어난 사건 그대로 묘사할 수가 있었습니다. 반면, 부활 사건은 지상에서 일어난 사건이지만 일상적인 경험을 넘어선 사건입니다. 부활의 과정을 목격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 과정을 목격 했다고 해도 그것을 제대로 이해할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과정을 보고 기록 했다고 해도 그 기록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3차원 공간과 1차원 시간을 넘어서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 사건으로 인해 지상에 남겨진 흔적(바닥에 놓여 있던 삼베와 개켜저 있던 수건)을 보고 미루어 짐작할 뿐입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부활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상대 안에 갇힌 우리에게 절대를 보여 주고, 시간의 한계 안에 갇힌 우리에게 영원을 보여 주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직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만지실 때에만 받아 들일 수 있는 신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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