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서 5장: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예언

해설:

느부갓네살 왕은 주전 589년에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토성을 쌓기 시작합니다. 그 때 주님께서는 에스겔에게 또 다른 상징 행동을 명합니다. 

주님께서는 칼로 그의 머리와 수염을 자르고 저울에 재어 삼등분으로 나누라고 하십니다. 예루살렘 성을 포위한 기간이 끝날 즈음에 삼분의 일은 불로 태우고 삼분의 일은 성읍 둘레를 돌면서 칼로 내려치고 나머지 삼분의 일은 바람에 흩어지게 하라고 하십니다(1-2절). 예루살렘 주민의 일부는 전염병에 죽고, 일부는 칼에 맞아 죽고, 일부는 포로로 잡혀갈 것을 행동으로 예언한 것입니다(12절). 또한 주님께서는 머리카락의 일부를 옷자락에 싸매 두었다가 불 한 가운데 던져 살라 버리라고 하십니다. 그것도 역시 이스라엘에 닥칠 재앙에 대한 예언이었습니다(3-4절). 

그렇게 하신 이유는 유다 백성이 이방 사람들보다 더 악한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5-7절). 그런 까닭에 주님께서는 이방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유다와 예루살렘을 심판하십니다. 그 재앙은 전무후무한 비극을 불러올 것입니다(8-12절). 주님께서는 그들에 대한 분노가 다 해소될 때까지 심판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13-15절). 그 심판은 기근으로, 전염병으로 그리고 전쟁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16-17절).

묵상: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혹독한 심판에 대해 예언 하시면서 주님은 “내가 내 분을 그들에게 다 쏟을 때에, 그들은 비로소 나 주가 질투하기 때문에 그와 같이 말하였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13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십계명을 주시면서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다”(출 20:5)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의인화 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질투하다”라는 말은 “열심을 보이다”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개역개정은 13절을 “나 여호와가 열심으로 말한 줄을 그들이 알리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이것은 사랑하는 대상을 뺴앗기지 않으려는 감정을 표현합니다. 의미를 담아 번역하자면 “질투할 정도로 사랑하시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은 당신 외에 다른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인간의 사랑을 독점 하려는 욕심에서 나온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 외에 어떤 대상도 인간을 복되게 할 수 없기 때문에 하신 말씀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아닌 다른 대상을 섬기면 그는 필경 그 대상에게 노예가 되고 그로 인해 그는 멸망의 길로 가게 됩니다. 그 불행한 운명에 이르는 것을 막기 위해 주님께서는 오직 당신만을 섬기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어기고 우상숭배에 깊이 빠지면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심으로 그 사랑을 표현하십니다.

심판에 대한 예언을 읽을 때 우리는 무의식중에 “하나님은 어쩌면 이렇게 까지 심판 하실까?” 하고 질문합니다. 질문을 잘못하면 엉뚱한 대답을 얻습니다. 이 예언을 읽을 때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유다 백성은 어쩌면 이렇게 까지 타락할 수 있을까?”입니다.  

5 responses to “에스겔서 5장: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예언”

  1. 멈출줄 모르고 끝까지 타락하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에 비례하여 노하시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통해 주님의 극진한 사랑과 열정을 배웁니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내 음성을 듣고 열면 들어가 그와 함께”의 말씀을 연상시키는 아침입니다.
    내 자신이 주님의 길에서 멀리 벗어나 있지 않나? 묵상하며 보내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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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하나님은 당신이 택한 사랑하는 민족이 우상 숭배로 인하여 불행의 늪 속에 빠져들지 않도록 수많은 예언자들을 통해 경고의 메세지를 날리셨지만 그들은 목이 곧아서 제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 또한 재물과 권력을 중요시한다면 이 보다 더 큰 재앙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행할 수 있도록 성령님의 인도를 받지 않으면 마귀에게 마약 중독 자들처럼 좀비 모양으로 끌려 다닐 것입니다. 주님! 오늘도 부족하고 연약한 이 몸을 붙잡아 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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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인류에대한 주님의 열심과 질투에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십자가의 길외에는 멸망과 죽음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웃과함께 축복과 생명의 길을 세상에 알리는 오늘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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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오늘 5장 말씀처럼 진노하신 하나님에 대해 읽을 때 특히 무서운 심판의 묘사를 읽을 때면 그동안 생각하고 기도했던 하나님, 예배하며 찬미했던 하나님의 이미지가 사라지는 것을 느낍니다. 사람으로 말하면 전혀 딴 사람 같은, 내가 그동안 잘못 알았나 싶은 그런 혼란스런 감정이 듭니다. 물론, 성경 곳곳에 진노하시며 심판하는 하나님, 전쟁으로 이방 군대를 멸하시는 하나님, 재해와 변고를 통해 이스라엘을 정죄하시는 하나님을 읽었기에 오늘 같은 묘사가 처음은 아닙니다. 심판이 사랑의 일부임을, 처절한 절망이 회복의 과정임을 받아 들이지 못하는 나의 철없음이 하나님을 낯설게 여기게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오늘 말씀은 시작일 뿐입니다. 더 무섭고 챙피한 묘사가 이어집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도시, 지도자와 백성을 겨눈 저주의 선언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의 배신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분노가 계속됩니다. 에스겔서 자체가 쉬운 책이 아닙니다. 환상으로 시작하는 이야기이며 상징과 상징성이 들어있는 책입니다. 에스겔에게 ‘지금’ 일어나는 일들 – 사회의 현실, 하나님의 명령 -이 우리 독자에겐 ‘과거’입니다. 성경에 에스겔만 예언자가 아니며 에스겔만 이스라엘의 죄와 심판에 대해 말한 것도 아닙니다. 시대의 산물로서 에스겔을 본다면 에스겔서를 통해 그가, 그리고 그를 통해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의 뜻이 있을 것입니다. 나아가 그 말씀을 읽는 우리가 각각 눈을 열어 보고 마음으로 새겨야 할 뜻이 있을 것입니. 당연한 것은 없다, 사실은 없다 (오직 해석만 있을 뿐), ‘누가’ 하는 말인가 (발화자를 주목), 질문하고 또 질문하라…현대 철학의 시작점을 알리는 몇가지 말입니다. 글을 읽을 때마다 잊지 않으려 합니다 책이든 기사든 페북 퍼온 글이든. 성경의 예언서에 관한 책을 찾아 읽어봐야겠습니다. 성경 읽기의 도전이며 또 재미는 앉아서 눈으로 읽은 글자가 내 마음에 불을 지피기까지 그 과정이 책마다 페이지마다 다르다는 데 있습니다. 무슨 마술처럼 방금 읽은 단어가 마음으로 들어와 불을 활활 지필 때도 있지만 딱딱한 음식처럼 온종일 우물우물 입에서 돌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성경책을 덮고 자리를 떠난 뒤에 갑자기 떠오르는 경우도 있고 늘 희미한 상태로 가물가물한 경우도 허다합니다. 묵상의 자리가 완료가 아니라 시작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낯설게 보인 하나님이 이제 어떻게 말씀하실지 – 무엇을 생각하게 하시고 생각나게 만드실지 – 기대하는 심정을 가져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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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기억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치 물을 떠나서 육지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물고기와 같습니다. 물고기가 물이 아닌 곳에서 살 수 없듯이, 우리가 그런 존재임을 기억합니다. 항상 진리는 완고함이 있는 것 같습니다. 타협으로 되어진 것이 아닌 필연적인 불가력 저항과 같은 완고함. 그 진리는 어찌보면 질투 혹은 편협함으로 보일 수도 있으며. 그러나 동시에 그 진리는 모든 것을 품어주는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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