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서 23장: 두 자매 이야기

해설:

주님께서는 북왕국 이스라엘(사마리아)과 남왕국 유다(예루살렘)을 각각 오홀라와 오홀리바라는 이름의 자매로 부르시면서 그들의 음행에 대해 책망합니다. 그들은 이집트에 있을 때부터 이집트 남자들과 음행을 즐겼습니다(1-4절). 여기서 음행은 정치적인 결탁과 동맹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먼저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와 주변 나라들과 맺었던 정치적 동맹 관계를 책망 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의 군사력과 경제력에 매료되어 하나님을 등지고 그들을 의지 했습니다. 그것은 오홀라가 앗시리아 남성들과 음행을 한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오홀라를 농락한 후에 버렸습니다(5-10절). 남왕국 유다도 앗시리아와 바빌로니아에게 홀려 음행을 저질렀습니다. 정치적 음행에 있어서 유다는 이스라엘을 능가했습니다. 바빌로니아 남자들이 욕망을 채우고 나서 오홀리바를 버리자 그는 이집트를 찾아가 그곳 남자들과 음행을 이어 갑니다(11-20절). 바빌로니아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이집트와 동맹을 맺은 것을 비유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앗시리아를 시켜 이스라엘을 치신 것처럼 바빌로니아를 시켜 유다를 치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그들 스스로 음행을 멈출 수 없으니 하나님께서 멈추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것은 그들의 정치적 음행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21-35절). 에스겔은 그 사실을 유다 백성에게 알려야 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는지를 알려 주어 다가올 심판에 준비 되어야 했습니다(36-49절). 

묵상:

이 장은 ’19금’ 혹은 ‘X’ 등급을 매겨야 할 정도로 노골적인 성적 표현이 가득합니다. 그동안 우상숭배에 대해 책망하는 과정에서 음행 혹은 간음이라는 비유를 사용했는데, 여기서는 정치적 결탁과 동맹 행위에 대해 같은 비유를 사용합니다. 음행에 대한 표현들이 매우 자극적입니다. 이스라엘과 유다는 배우자에 대한 신뢰와 신의를 버리고 강해 보이는 남성들을 찾아 거침없이 음행을 일삼는 여인과 같다고 하십니다. 이 비유와 표현에서 우리는 그들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강력한 혐오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운명을 다스리고 있다는 사실을 거듭 보여 주었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강해 보이는 나라들을 찾아다니며 외교적 결탁과 동맹과 원조를 구걸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어느 나라도 그들을 진심으로 생각해 주지 않습니다. 그들은 마치 욕정을 채우기 위해 능욕할 상대를 찾아 다니는 남자들과 같습니다. 어리석게도 오홀라와 오홀리바는 그들의 욕망을 채워주면 자신들을 사랑해 줄 것처럼 오해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욕망을 채우는 즉시로 그들을 버릴 것입니다. 에스겔이 이 예언을 받을 때 이미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 의해 버림 받았습니다. 이집트와 음행을 즐기고 있는 유다도 머지 않아 바빌로니아에 의해 능욕 당할 것입니다. 그 때에야 비로소 그들은, 그들을 진실로 아끼고 사랑해줄 분은 하나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4 responses to “에스겔서 23장: 두 자매 이야기”

  1. 오늘의 말씀은 저희들이 처해있는 상황을 수천년전에 예언하시는 경고입니다. 대륙세력과 해양세력 사이에서 주님을 의지하지않고 갈팡질팡하는 처량한 신세입니다. 심판의 칼이 들려진것을 깨닫고 온세상이 십자가에 무릎을 끓는 세대가 되도록 간구합니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자비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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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본문은 읽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오죽 했으면 민망한 표현을 했을 까요. 오늘의 시대와 같습니다. 생일을 맞이한 사귐의 공동체가 하나님을 행한 첫사랑을 회복하여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회복되게 하옵소서. 아멘. 하나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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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영적인 음행을 행하지 않게 하소서! 신실한 믿음과 충성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마음이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단 하루도, 한 순간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살 수 없음을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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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매일 아침 성경을 한 장씩 읽고 묵상하는 일이 한 장으로, 한 두 개의 키워드로 딱 떨어지게 ‘정리’되지 않는 일임은 사귐의 소리 묵상을 하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 대하는 두 자매의 이야기는 일주일 전쯤에 읽은 16장과 겹쳐집니다. 그 때도 페이지 곳곳에서 폭탄이 터지는 듯 했는데 23장은 눈 뜨고 보기 어려운 처참한 장면들로 가득합니다. 두 자매 이름의 공통점은 텐트입니다. 오홀라 ‘그녀의 텐트,’ 오홀리바 ‘그녀 안에 있는 나의 텐트’ 라는 이름입니다. 광야에서 예배하던 성막을 떠올리게 합니다. 두 자매의 이름은 여호와와의 관계를 배경에 두고 지어진 이름입니다. 16장에 나오던 여자에겐 이름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여자들은 다 똑같이 배신하고 죄를 짓습니다. 남편을 저버리고 욕정에 이끌리어 사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그려집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우상숭배 문화와 정치 외교적 행보가 몸을 파는 여인의 비유에 같이 들어가 있습니다. 결혼 서약을 깨는 것이 개인 차원의 죄라면 불순한 의도의 정치적 계약은 국가 차원의 죄입니다. 파장의 크기는 다르지만 죄의 결과는 본인에게 국한되지 않습니다. 오늘의 묵상도 또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옵니다. 나의 텐트는 주님의 텐트인가, 주님의 텐트가 내 안에 있는가. ‘광야 같은 인생길’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광야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구하는가. ‘나의 도움이 어디에서 올까’하며 한숨 쉴 때 내 눈은 주님이 계시는 하늘 – 머리 위에 펼쳐진 파란 하늘 – 뿐 아니라 가장 나중 때까지 지니고 가는 내 깊은 자아의 텐트를 바라보는가….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께 향하게 하소서. 몸을 돌려 주님께 향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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