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서 32장: 스올에 내던져질 이집트

해설:

앞의 예언이 임한 지 1년 7개월 후(주전 585년)에 이집트에 대한 또 하나의 예언이 에스겔에게 임합니다(1절). 주님은, 이집트 왕 바로(호브라)가 스스로를 사자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나일 강에 사는 악어와 같다고 하십니다. 바로에게는 모욕적인 비유입니다. 주님은 그 악어를 잡아 육지로 끌어 올려 날짐승과 길짐승의 먹이가 되게 하겠다고 하십니다(1-8절). 그 소식이 전해지면 뭇 민족은 두려워 떨 것입니다(9-10절). 그 예언은 주님께서 바빌로니아를 통해 이집트를 심판하실 때 이루어질 것입니다(11-16절).

17절부터 32절은 앞의 예언보다 11개월 전에 임한 예언입니다. 주님은 에스겔에게 이집트를 애도하며 슬피 울라고 하십니다. 심판이 임하면 그들은 스올에 내려가 이미 그곳에 와 있던 앗시리아 사람들과 엘람 사람들과 메섹과 두발 사람들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에돔 왕과 그 백성 그리고 시돈 사람들도 그곳에 묻혀 있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이 심판을 받아 스올에 내려갈 때, 다른 민족들이 먼저 와 있는 것을 보고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살아 생전에 세상을 호령하던 바로도 결국 그의 군대와 함께 스올에 임할 것입니다.

묵상:

이 예언은 마치 단테의 <신곡> 지옥편의 한 장처럼 보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당하게 되어 있고, 그 후에는 스올 즉 죽은 자의 세계로 내려가게 됩니다. 이집트나 앗시리아 혹은 바빌로니아처럼 강한 나라의 민족도 그렇게 되고, 바로나 느부갓네살 혹은 알렉산더 같은 절대 권력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너무나도 명백한 사실인데, 사람들은 그 사실을 너무나도 쉽게 잊습니다. 부나 권력이나 명성을 가진 사람은 더욱 그 사실을 쉽게 잊고 교만 해집니다. 그래서 로마의 현자는 정복 전쟁에서 승리한 군대가 개선 행진을 할 때, 맨 뒤에서 한 사람이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고 외치게 했습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제대로 살기 위해 꼭 기억할 사실은 모두가,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모두가 죽는다는 사실은 한편 두려운 일이지만 다른 한편 다행한 일입니다. 스올에 내려간 이집트 사람들이 그곳에 다른 강대국 민족들이 와 있는 것을 보고 위로를 얻은 이유(31절)는 죽음이 모두에게 공평하다는 사실을 확인하였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불공평해 보이는 세상사와 인생사에 있어서 죽음은 공평하다는 사실은 큰 위로입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위로가 있습니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부활 사건은 스올이 인간의 종착지가 아님을 증명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으로 인류를 창조하신 분이 인류를 스올에 쓸어 넣고 끝내지는 않으실 것이 분명합니다. 어떤 작가가 정성들여 만든 자신의 작품이 쓰레기통에 내버려지는 것을 참겠습니까? 전능의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리고 그분이 진정 사랑의 하나님이 맞는다면,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스올이 아니라 에덴이어야 합니다.   

5 responses to “에스겔서 32장: 스올에 내던져질 이집트”

  1. 인간의 종착지가 어딘가를 상기시켜주는 말씀속에 부활의 능력을 십자가를 통해 바라보게 됩니다.
    이 생에서는 누구나 피할수없는 죽음 앞에 겸손해지고 경건하게 받아들이게 마련이지만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 후의 삶을 바라보는 희망을 갖게 되는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흙에서 영원으로 이어지는 영생을 그려보며 십자가의 부활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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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스올로 빠진다는 평범한 진리가 새롭게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요 11:25~26) 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기억났기 때문입니다. 주님! 이 말씀을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잊지 않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 되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아멘. 하나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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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하나님이 우리에게 잠을 허락하신 이유는 아둔한 우리가 죽음이후 미지의 세계를 짐작할수 있도록 하기위함이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누구나 잠을 피할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잠의 이후를 걱정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침에 깨어날 것을 믿기 때문이죠. 자는 동안은 시간이 얼마나 흐르는지ㅜ인지하지 못하지만 깨어나면 신선한 아침이 기다리고 있지요. 부모 형제와 잠자기 전에 인사를 하면서 슬퍼 우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일 아침 다시 볼수 있으니까요. 우리 믿는 사람도 그런 희망을 가지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죽음으로 인해 우리가 잠시 헤어지는 것은 마치 밤에 인사하는 것과 같으며 아침에 눈을 떠서 하늘나라에서 서로 건강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인사하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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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인터넷 연결이 잘 안되어 답답한 새벽이었습니다. 인터넷에 ‘목을 매고’ 사는 일이 오래된 게 아닌데도 새로운 발전이 가져온 편리함은 그 전에 하던 방식을 까맣게 잊게 만듭니다. 본문의 앞부분에선 파라오가 당할 심판이 총천연색으로 그려집니다. 몸을 뜯기고 그 시체로 골짜기가 가득 찹니다. 피가 땅을 적시는데 산꼭대기까지 푹 적십니다. 풍부한 물가에 사는 이집트의 모든 가축도 따 쓸려 사라집니다. 그런데 14절은 여호와께서 이집트 백성의 물을 말게 하고 올리브 기름처럼 흐르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희망일까요. 후반부는 이집트보다 먼저 스올로 내려간 민족들을 열거합니다. 먼저 멸망해 지하의 세계에 누운 사람들입니다.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표현이 여러번 나옵니다. 이집트에게 굳이 할례를 받지 않은 민족이라는 구분이 필요할까 싶습니다. 이집트 자신이 할례를 받지 못한 자들인데요. 죽음의 세계에는 높낮이가 없음을, 힘의 세기도, 권력의 위력도 없음을 확인시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에 나오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가 생각납니다. 살아 생전에 위로 받을 것을 다 받았던 부자. 나사로의 고통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그는 바로 그 자리에 있는 자기 자신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 형제들에게 누군가가 경고해 주기를 원합니다. 이 시대는 우리에게 무엇을 들으라고 하는지요. 이 생에서 내가 바라는 것은 할례 받지 않은 사람들이 바라던 것과 같은 아니겠지요. 아니어야 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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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오늘도 겸손히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나아갑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분명히 전하며, 회중은 그 말씀과 마음에 순종함으로 협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동시에 설교자는 자신이 신격화되어지거나 권위적이지 않아야 하며, 회중은 교만하지 않고 사랑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한 공동체가 되어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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