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서 33장: 예언자의 사명

해설:

에스겔서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1-24장은 유다에 대한 심판 예언이고, 25-32장은 주변 나라들에 대한 심판 예언입니다. 33장부터 48장까지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회복에 관한 예언입니다. 

주님은 에스겔에게 파수꾼으로서의 예언자의 사명에 대해 말씀 하십니다(1-9절). 같은 말씀이 3장 16-21절에도 나옵니다. 예언자는 백성에게 심판에 대해 경고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소임을 다한다면 그의 경고를 듣고도 외면하여 망한 사람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예언자가 소임을 게을리 하여 백성이 망했다면 그 책임은 예언자에게 있습니다. 

10절부터 20절은 18장 19-32절의 내용과 거의 같습니다. 과거에 악하게 살았다 해도 회개하고 의롭게 살면 구원 받을 것이며, 과거에 의롭게 살았다 해도 지금 악하게 살고 있다면 심판 받을 것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처사를 두고 공평치 못하다고 불평하지만, 의롭지 않는 것은 그들입니다. 주님의 판단과 심판은 공정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지 다섯 달이 지난 어느 날, 예루살렘에서 도망 온 사람이 에스겔에게 와서 그 소식을 전합니다(21절). 바로 전 날, 이미 주신 예언(24:20-21)의 약속대로 주님의 권능이 그에게 임하여 묶였던 혀가 풀려 말을 할 수 있게 됩니다(22절).

주님께서는, 유다 땅에 남겨진 사람들이 자신들이 그 땅을 지킬 수 있다고 장담하고 있으나(23-24절), 그들은 그 땅을 차지할 자격이 없다고 하십니다. 율법이 금한 온갖 죄를 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25-26절). 그로 인해 살아남은 백성 마져도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27-29절).

주님은 에스겔에게 백성이 그가 전하는 예언을 듣기만 할 뿐 행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알리십니다. 하지만 그를 통해 전한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니 용기를 잃지 말라고 하십니다(30-33절).

묵상:

주님께서는 에스겔의 묶인 혀를 풀어 주시면서 앞으로 그가 예언할 때 마주하게 될 현실에 대해 경고하십니다. 그가 전하는 말에 대해 백성은 호기심을 보일 것이지만, 그들은 듣기만  할 뿐 그 말씀에 순종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입으로는 달갑게 여기면서도, 마음으로는 자기들의 욕심을 따르기 때문이다”(31절)라는 구절을 직역하면 “그들의 입에는 탐욕이 있고, 그들의 마음은 부정한 이익을 향하기 때문이다”라고 해야 합니다. 그들의 몸과 마음이 악에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행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아니, 행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언자를 “사랑의 노래나 부르는 가수쯤으로”(32절) 생각합니다.

이 말씀이 오늘의 교회가 처한 상황을 그대로 묘사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설교자가 자신들의 귀를 만족스럽게 해 주기를 기대합니다. 하지만 그들 자신의 행실을 돌아 보는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설교자들은 사람들의 귀를 만족시켜주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오늘의 설교는 가수들이 부르는 사랑 노래 쯤으로 폄하되고 있습니다. 가수들 중에도 시대를 노래하고 정의를 부르짖는 사람들이 있는데, 오늘의 설교에서는 시퍼런 칼날이 모두 제거되고 부드러운 솜사탕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설교자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바른 말씀을 전할 책임이 있고, 회중은 들려지는 말씀에 겸손히 고개 숙이고 자신의 삶을 돌아 볼 책임이 있습니다. 그것이 회복의 출발점이고 희망의 이유입니다. 

4 responses to “에스겔서 33장: 예언자의 사명”

  1. 주님, 수고하는 설교자를 격려하고 힘을 더해 주셔서 말씀을 듣는 우리가 한마디 한마디로 감동을 받아 눈물흘려 회개하고 변화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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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의롭게 살다가 악행을 저지른 자에게 책임을 묻고 의로운 삶을 기억하시지도 않고 악하게 살다가 의롭게 사는 사람을 구원하시고, 파수꾼의 경고에도 듣지 않는 자는 자신의 책임이고 파수꾼이 경고 메세지를 전하지 않으면 파수꾼에게 책임을 물으시는 하나님의 공평하심을 믿습니다. 하나님! 오늘 귀로 듣는 것이 달콤한 말만 듣게 마시고 세미한 가운데 주님의 경고의 음성을 듣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시옵소서. 아멘. 하나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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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에스겔의 입이 열려 말을 하게 되었다는 오늘 본문은 요즘 같은 말의 홍수 시대에는 그냥 지나쳐버릴 구절 같지만 진실에 목마른 사람은 보이고 들리는 모든 것에서 진실을 찾으려 애씁니다. 하지만 에스겔 앞에 앉아 듣기는 들어도 실천하지 않는다는 본문의 끝부분은 사유와 성찰을 넘어 행동의 변화로 옮겨 붙어야 하는 불씨가 안타깝게도 그냥 사그라들고 마는 것을 보여 줍니다. 매주 설교를 하는 목회자의 눈으로 본문을 읽는 것과 설교를 듣는 신도의 눈으로 읽는 것이 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시대의 목회자들을 성서의 예언자들로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있습니다. 교회는 설교를 말씀 선포 (케리그마)라고 규정합니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와 회개로의 초대는 케리그마의 예입니다. 자신에게 위탁된 메시지를 권위있게 선포하는 것을 케리그마라고 정의할 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 자체이자 말씀의 전달자이십니다. 메시지와 메신저이십니다. 예배에서 설교가 갖는 무게는 케리그마의 권위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도 목사님들은 ‘설교에 토 다는’ 것을 가장 싫어합니다. 설교는 ‘성역’이 되었습니다. 설교에 대해 교인들이 말할 수 있는 때는 소그룹의 토론용 과제로 재구성 했을 때가 유일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파숫군이나 경계병 watchman으로 부르십니다. 케리그마의 메신저라고 부르십니다. 경계병이 경계 선 내용을 말할 때 듣고 난 뒤의 일은 들은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선포된 말씀을 감당하는 몫은 청중의 것입니다. 오늘 교회에서 듣는 설교가 케리그마인가라는 논의는 따로 태클해야 할 것입니다. 구약 성서의 예언자들과 신약 성서의 설교자들이 오늘의 설교자들과 동일한가라는 껄끄러운 물음도 물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의 미래를 말할 때 특히 코비드 팬데믹 이후의 교회를 이야기할 때 예배를, 특히 설교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설교를 ‘좋은 말씀’으로 여기면 설교의 자리는 점점 작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예배가 아니어도 좋은 말씀은 넘치도록 많기 때문입니다. 만일 설교를 회개의 촉구요 입에 쓴 경고의 약이라고 하면 설교자부터 심판대에 서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도 실천하지는 않는 (32절) 병을 고치는 길은 무엇일까요. 설교자도 청중도 늘 ‘말의 성찬’을 대하면서도 몸은 튼튼해지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배고픔을 모르기 때문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갈증이나 허기를 모르는 상태에서 식탁에 앉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설교자도 청중도 더 이상 겸손하지 않은 시대, 설교자는 자기 할 말이 너무 많고, 청중은 무엇이든 이미 다 안다고 믿는 시대에 침략자의 말발굽 소리가 과연 들릴까요.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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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제일 먼저 바울사도가 데살로니가 회당에서 복음을 전한 장소가 수도원이 되었다가 지금은 많은 순례자 들이 방문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그곳을 방문 하며 인생을 걸고 십자가의 복음을 전한 바울사도에게 감사함을 드렸습니다.올바로 살지도 못하고 구원의 복음을 제대로 전하지도 못한 가련한 처지입니다. 오직 주님의 십자가만 의지하는 비겁한 인생에게 자비를 간구하는 오늘입니다. 주님의 자비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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