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 5장: 지혜에 대한 정절

해설:

이 장에서는 지혜를 따라 사는 삶을 아내에 대해 정절을 지키는 것에 비유합니다. 결혼한 배우자에게 정절을 지키는 것은 지혜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지혜에 속합니다. “음행하는 여자”는 성 매매 여성 혹은 음란한 여성을 의미합니다. “음행하는 남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상대와 성적인 관계를 가지는 것은 꿀처럼 달콤하지만 끝맛은 쑥처럼 씁니다. 음행을 추구하는 것은 멸망을 자초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성적으로 유혹하는 이성을 멀리해야 합니다. 그것은 수치를 당하게 하고 정신과 육신을 망가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 끝에서 반드시 후회하게 되어 있습니다(1-14절).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배우자에게 정절을 지키고 부부 사이의 관계에서 만족을 얻습니다. 15절과 16절은 에로틱한 비유로 부부 관계를 묘사합니다. 자신의 아내와 사랑을 나누는 것에 만족하라는 뜻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내를 귀하게 여기고 사랑해야 합니다. 아내도 남편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배우자를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부정한 이성의 품을 찾지 않습니다(15-20절). 

성적인 유혹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꼭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것을 보고 계시다는 사실이고(21절), 다른 하나는 죄악은 불행을 불러오게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22절).

묵상:

전통적인 성 윤리와 가정 윤리가 위협 받고 있습니다. 프랑스 68 혁명에서부터 시작된 성 해방의 운동이 한계를 모르고 확장되고 있습니다. ‘폴리 아모리'(결혼은 하지만 부부 합의 하에 성관계는 구속하지 않는 관계)가 좋은 대안처럼 여겨지고 있는 시대입니다. 성적 관계에서 절제, 정절, 순결 같은 덕목이 어리석게 취급 당하고 성적 욕망을 극대화시키는 것이면 무엇이든 허용하자는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 사조에 익숙한 사람이 이 장을 읽으면 질식할 것 같은 답답함을 느낄 것입니다. 

성적 윤리에 대한 가르침을 꽉 막힌 꼰대들의 생각이라고 여기는 우리 시대는 성서의 지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것은 3천 년 전에나 통하던 말이지, 지금은 그렇게 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지혜를 신실하게 실천해 본 사람은 압니다. 결혼 관계 안에서 서로를 귀하게 여기고 사랑을 키워 온 사람들은 3천 년 전의 진리가 지금도 여전히 진리라는 사실을 압니다. 사실, 이 책이 쓰여진 3천 년 전에도 지혜를 조롱하고 성적 정절을 어리석음으로 간주 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오늘도 두 가지 사실 즉 주님께서는 내 마음 깊은 곳까지 감찰 하시며 일거수 일투족을 모두 보고 계시다는 사실과 죄의 길은 겉으로는 쾌락을 주는 것 같지만 결국 불행으로 인도한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6 responses to “잠언 5장: 지혜에 대한 정절”

  1.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주님께서 내게 주신 아내를 사랑하고 다른 음란한 여인을 처다 보지도 말게 성령님께서 도와 주시고 하나님께서 지켜보시고 있지 않더라도 아내를 끝까지 사랑하게 하옵소서. 아멘. 하나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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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가정은 주님께서 제일 먼저 허락하신 사랑과 정결의 공동체 입니다. 부부간에 관계는 주님안에서 맺은 언약 이기에 성결하고 투명해야 합니다. 음란해가는 세상에 깨끗하고 참신한 예수님 중심의 가정을 믿음의 식구들이 세상에 보이도록 도와주십시오. 진행되어가는 손자와 말씀 읽기와 나눔을 위해 주님의 지혜와 명철을 간구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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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Taekhwan - T.K. Lee Avatar
    Taekhwan – T.K. Lee

    지혜로운 삶을 선택하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여러가지 의견과 생각들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가지고 올바르게 반응하며 실천하는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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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하나님께서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보고 계신다”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묵상해 봅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의 행동을 보여드리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마음이 아프셨을 만한 행동을 더 많이 했기에 부끄럽기만 합니다. 오늘 하루는 죗된 본성을 누르며, 하나님의 의만 드러내는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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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오늘은 지혜를 약속의 관점에서 생각해 봅니다. 약속은 공통의 이해와 신뢰를 전제로 하는 일입니다. 몇 시에 어디에서 만나자라는 약속은 양측이 장소와 시간을 알고 있고 (이해), 상대방이 나올 것이라고 믿으니까 하는 일입니다. 일회성의 약속부터 ‘백년가약’의 약속처럼 백년이 가는 약속도 있습니다. 지혜를 중하게 여긴다면 약속 또한 중하게 여깁니다. 약속을 지키는 일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계속 이어져온 덕목입니다. 약속의 이행을 어느 만큼 느슨하게, 혹은 타이트하게 요구하는가 하는 문화적인 차이는 있을지라도 지켜도 그만, 안 지켜도 괜찮다고 여기는 사회는 없을 것입니다. 결혼은 약속 중에서 특별한 약속입니다. 두 사람이 하는 약속이지만 그 영향력은 두 사람을 넘어갑니다. 당사자 뿐 아니라 주변 사람의 삶을 바꾸기도 합니다. 목사님 해설에 나오는 폴리아모리 polyamory 는 비독점 다자연애 즉 배우자가 또 다른 애정관계를 할 수 있다고 부부가 허락하는 라이프스타일로 일부일처제의 대안처럼 보기도 합니다. 이 풍조를 받아 들이는 부부는 스스로 ‘지혜롭다’며 결정을 했을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니 마음이 서늘해집니다. 사회적 규범과 윤리의 기준이 기독교적 영향권 밖으로 벗어나는 것을 목격합니다. 서구 문명의 토대가 되는 기독교적 세계관이 도전을 받습니다. 도전 자체를 금기시할 것은 아닙니다. 변화를 거부하는 것도 방법이 되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역사적인 위치가 흔들리는 배경에는 ‘사탄의 조종’만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타락, 특별히 그리스도인들 스스로 약속을 저버린 책임이 있습니다. 결혼식이 기독교 예식이든 아니든 결혼의 중심에는 서로를 사랑하고 존중한다는 약속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사랑과 존중은 자기부정과 희생을 요구합니다. 자기 원하는대로 사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라고 가르치는 세상 속에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새롭거나 달라진 질문이 아닙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나는 어디에서 왔나? 주말 사이에 엄청난 비극이 한국에서 일어났습니다.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 놓인 유가족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생존자들의 회복을 빕니다. 꽃다운 청춘들…..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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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김목사님 이번주 설교말씀이 제 마음에 깊게 남습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납니다. 특히 젊은 세대에서. 잘 생각해보면 교회가 왜 관심밖으로 사라지는지 알것도 같습니다. 성적인 문제, 교회 재정에 관련된 이야기들, 정치와 결탁된 혐오감 등도 큰 원인이 되겠지만 가장 근본적 원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매력이 없기때문입니다. 내 목숨을 걸만한 가치와 열정을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세력에 교회가 너무 쉽게 타협하고 평화의 이름으로 변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교회가 하던 일을 자선단체, 명상교육기관, 정부나 인권기관이 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공격하는 세력과 비교하면 교회는 더이상 날렵한 선수가 아닙니다. 많이 위축되있고 비대한 몸은 엄청난 공격에 얻어맞고 있습니다. 저는 지하철에서 불신지옥이라고 외치는 분들의 소음을 싫어합니다. 또 무례하게 교회를 전하는 신자의 태도도 매우 싫어합니다. 하지만 왜 그들이 그렇게 절박한지는 이해합니다. 내 형제가 앞못보고 절벽끝으로 걸어갈때 교양있게, 조용한 목소리로 그를 멈출수 있을까요? 아니면 목덜미를 잡아서라도 그를 멈출까요. 옷이 구겨지거나 넘어져 상처나거나 화를 내면 어쩌나 이런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심각한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선거에서 보수, 진보 거대 양당 사이에 고전하는 정의당 후보가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조직도, 돈도, 언론의 도움도 없다. 하지만 모든것을 가진 저들과 다르게 우리는 ‘죽을 각오’로 뛴다. 지금 우리에게 이런 결기가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 문화가 공격하는것이 무서워 잡음내지 말고 소란피우지 말고 조용히 넘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교회에 봉사하고 착하게 살았지만 죽어 하늘에 올라 예수님이 나를 모른다 하실지 겁이 납니다. 목숨걸고 믿음생활을 하지 않았다고요. 교회는 친목단체도 윤리를 가르치는 학교도 아닙니다. 목사님이 말씀처럼 정절을 그리고 내 믿음을 지킴에 목숨걸고 한다는 마음을 주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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