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앞 장에서 전도자는 악인이 의인의 상을 받고 의인이 악인의 벌을 받는 것 같은 상황에 대해 고민을 토로한 바 있습니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해 곰곰이 생각한 끝에 모든 것은 하나님의 처분에 의한 것이라는 결론이 이릅니다. 인간으로서는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가 없습니다(1절). 크게 보면, 의인이나 악인이나, 지혜자나 어리석은 자나 같은 운명(죽음)을 타고 난 셈입니다(2절). 전도자는 그것이 가장 부조리한 일이라고 말합니다(3절). 죽음은 모든 것을 헛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4-6절).
그렇기 때문에 살아 있다는 것은 어쨋거나 좋은 일입니다. 영원의 차원에서 보면 한 사람의 일생은 헛되고 덧없어 보이지만, 그 하루하루는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동안에 모든 일에 정성을 다하고, 서로 사랑하며, 함께 기쁨을 나눠야 합니다(7-10절).
전도자는 세상사와 인생사가 공식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언급합니다. 선하게 산다고 해서 복 받는 것도 아니고, 악하게 산다고 해서 벌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물고기가 잔인한 그물에 걸리고 새가 덫에 걸리는 것처럼, 아무 이유도 없이 불행이나 재앙을 만나기도 합니다.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가 없습니다(11-12절).
전도자는 충격적인 일 하나를 더 소개합니다. 어떤 성읍이 포위되어 함락될 위험에 빠져 있을 때 가난 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이 그 성읍을 구합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그 사람을 오래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높임 받을 줄 알았는데, 그 사람이 가난하다 해서 무시 당한 것입니다(13-16절). 지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17-18절).
묵상:
“인간은 왜 윤리적으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철학자들은 두 가지 방식으로 답합니다. 하나는 “그렇게 사는 것이 옳기 때문이다”라는 설명이고, 다른 하나는 “윤리적으로 살아야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라는 설명입니다. 앞의 것을 ‘존재론적 윤리’라 부르고, 뒤의 것을 ‘목적론적 윤리’라고 부릅니다.
잠언은 지혜에 대해 목적론적으로 접근한다 할 수 있습니다. “왜 지혜를 알아야 하고 지혜를 따라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잠언은 “그것이 참된 행복을 얻는 길이기 때문이다”라고 답합니다. 반면, 전도자는 지혜에 대한 목적론적 이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합니다. 평생토록 지혜를 연구하고 지혜를 따라 살아 보았지만 지혜가 약속하는 행복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지혜가 무용 해지는 상황도 자주 만났다고 말합니다. 인생사를 지켜 보니, 지혜를 따라 사는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별로 다를 바 없더라고 말합니다.
이 결론은 두 가지의 선택지 앞에 우리를 서게 합니다. 하나는 “케 세라 세라”(될대로 되라) 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세상이 어떻게 되든 상관 없이 나 좋을 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비록 지혜가 당장 행복을 가져다 주지 않는다 해도 그때그때 지혜를 분별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최종적인 결정을 하나님께 맡기고 비록 제한적이고 불분명하지만 현재 아는만큼의 지혜를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전도서는 우리에게 지혜를 존재론적으로 받아 들이게 합니다. 지혜를 찾고 지혜를 따라 살아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옳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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