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68편: 지극히 낮은 곳에 오신 지극히 높으신 분

해설:

이 시편은 다윗의 찬송시로 되어 있습니다. 이 시편도 역시 추수를 감사하는 예배에서 불려졌던 찬송이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일어나실 때”(1절) 모든 원수들은 흩어지고 악인들은 녹아 버릴 것이며(2절) 의인들은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라고 고백합니다(3절). 그러면서 다윗은 회중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권고합니다(4절). 그 위대하고 전능하신 분은 “고아들의 아버지, 과부들을 돕는 재판관”(5절)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분은 “외로운 사람들에게 머무를 집을 마련해 주시고, 갇힌 사람들을 풀어”(6절) 주십니다. 한 없이 크신 분이지만 한 없이 작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시는 분이시고, 가장 높은 분이지만 또한 낮은 곳을 살피시는 분입니다. 반면, 그분을 거역하는 사람은 “메마른 땅”(6절)에 서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이어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인도하실 때의 장면을 회상합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실 때 그분이 행하신 일들은 놀라웠습니다(7-9절). 또한 백성이 가나안 땅에 정착 했을 때 “메마른 땅으로 옥토로 만드시어”(9절) “주님의 식구들을 거기에서 살게 하셨습니다”(10절). 하나님이 이렇게 행하신 이유는  “가난한 사람을 생각하셔서”(10절) 하신 일입니다.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을 돌보아 주신 것입니다. 또한 주님은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하도록 도우셨습니다(11-14절). 

“바산의 산”(15절)은 이스라엘의 북쪽 산악 지방을 가리킵니다. 이곳에 사는 이방인들은 그 높은 산세 만큼이나 강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스라엘에게는 항상 위협이 되었습니다. 바산의 산에 비하면 시온 산은 낮은 언덕처럼 보였습니다. 다윗은 그것을 은유로 사용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산의 높은 산들을 제쳐 두고 시온 산을 당신의 거처로 삼으셨습니다(16절). 마찬가지로 그분은 크고 강대한 나라들을 제쳐 두고 가장 연약한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선택하셨습니다. 하지만 시온의 하나님은 바산의 하나님이기도 하십니다(15절). 시온 산에서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은 모든 민족을 다스리십니다(17-18절). 

다윗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일들을 회상한 다음 다시금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권면으로 돌아갑니다(19절). 열국을 다스리시는 그 위대하신 하나님은 또한 한 사람 한 사람의 근심을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짐을 대신 짊어”(19절)지시고 “우리를 죽음에서 구원하여 내시는”(20절) 분이십니다. 그분은 죄악을 일삼는 자들을 징벌하시는 분이십니다(20-23절). 그런 분이 우리의 근심을 살피시고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24절부터 27절까지는 예배를 위해 제사장들과 합창대와 회중이 행진하여 들어가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그 행렬의 장엄함은 곧 하나님의 위엄을 상징합니다. 그러면서 다윗은 하나님께 “주님의 능력을 나타내 보이십시오”(28절)라고 기도합니다. 29절부터 32절에서 다윗은 세상의 왕들이 온갖 귀한 예물을 가지고 성전으로 오고 있는 모습을 그립니다. 그것은 다윗이 예배 중에 마음으로 상상했던 광경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능력을 나타내 보이실 때면 그런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태고의 하늘을 병거 타고 다니시는 분”(33절)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영원 하시고 전능 하시다는 의미입니다. 그분은 “성소에 계시는 하나님”(35절)이시지만 또한 “그의 위엄은 이스라엘을 덮고, 그의 권세는 구름 위에”(34절)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분을 아는 사람들은 마땅히 그분을 찬송하고 그분의 위엄을 높여야 합니다.

묵상:

하나님은 위대하시고 전능하시고 영화로우십니다. 그분은 온 인류의 주님이시고 모든 나라의 왕이십니다. 그분이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시면 그 앞에 설 자가 없습니다. 그분이 숨을 내쉬면 그 앞에서 버틸 자가 없습니다. 그분의 호령에 모든 생명은 두려워 떱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상상할 수 없이 크시고 높으시고 귀하시며 강하신 분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생각하면 우리는 그분 앞에서 두려워 떨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에게서 얼굴을 감추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그 하나님은 또한 “고아의 아버지, 과부들을 돕는 재판관”(5절)이십니다. 그분은 높고 아름다운 모든 산을 제쳐 두고 시온 산을 거처로 삼으셨으며, 크고 강한 모든 나라들을 제쳐 두고 가장 작은 나라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분은 힘 없는 여인들을 돌보시고,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십니다. 가장 높으신 분이 가장 낮은 곳을 살피시고, 가장 강하신 분이 가장 약한 사람들을 도우시며, 가장 크신 분이 가장 작은 사람들을 살피십니다. 

그분은 오늘 이곳에 사는 나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그렇기에 그분을 내가 오늘 “아빠”라고 부르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분을 생각하며 찬송 드립니다. 온 우주와 온 인류의 주인이시며 왕이신 그분이 나를 찾아 오셨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감격하며 찬송과 경배를 올립니다. 

5 responses to “시편 68편: 지극히 낮은 곳에 오신 지극히 높으신 분”

  1. 상상을 초월하시는 주님을 생각 할 때마다 내 존재가 의미가 없는 거 같지만 가난한자를 도우시며 어린아이의 편에 서시는 주님 이기에 감히 내 자신을 의탁합니다.
    찬양과 기도를 드리며 주님을 경외하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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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인간의 언어로 어찌하나님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습니까? 그저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안에 갇혀 삶으로 그분을 알아갈 수 있도록 주신 오늘 하루도 염치 없이 온전히 하나님 아버지께 맡기고 살게 하옵소서. 아멘. 하나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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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모든것을 항상 주관하시고 사랑과 구원과 평화의 여호와 주님을 믿고 의지합니다. 전지전능 하시고 핍박받고 소외된자들의 눈물을 닥아주시는 긍휼의 주님 이십니다. 가장 높으신 주님이 굶주리고 헐벗은자들을 위해 십자가의 고통을 격으신 은혜의 주님을 기억하며, 믿음의 가족들과 더불어 주님께서 가시는 길을 십자가를 지고 걷는 오늘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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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과부와 고아…가장 약한 사람, 가장 힘들게 사는 사람의 대명사입니다. 홀아비는 과부와 같은데도 ‘약자’ 라고 하지 않습니다. 측은해 보이기는 하지만 막막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경제력의 차이겠지요. 성서를 읽으면서 마음이 울컥해 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때 감사와 감동으로 마음이 벅찹니다. 내게 베푸신 복을 헤아릴 때는 물론이요, 나처럼 모자라고 약한 자를 기억하시는 주님을 볼 때 얼마나 감사한지요. 과부나 고아가 아니어도 살다보면 과부나 고아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여자라서 그런걸까요. 여자는 남자의 돕는 배필 (helpmate – 룸메이트도 아니고) 로 지어졌으니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도 세뇌를 받아서 그럴까요. 평생 ‘을’의 자리를 지킬 것. 여성 신학자들의 시각이 신선하고 반갑게 느껴지는 이유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 아니라 여성의 자리에서 보이고 느끼는 것도 가치가 있는 것으로 긍정하기 때문입니다. 너무 오랫동안 하나님을 남성화 했습니다. 하나님을 남성으로 보는 시각 자체가 여성을 밀어 버리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수가성의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청한 장면을 생각해 보면 마음이 울컥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여인에게 남편이 여럿 (다섯?) 있었다는 사실부터가 짠 합니다. 오죽하면. 과부살이가 얼마나 힘들면 차라리 남자를 여럿 바꾼/거친/잡은 여자라는 소리를 듣는게 낫겠다 싶었을까요. 그 여인에게 물을 달라며 먼저 말을 거는 예수님. 우리의 물이신 예수님이 그 우물 아니면, 그 여인 아니면 물을 얻어 마실 데가 없었을까요. 여인의 마음에 우물을 파 주신겁니다. 살 길을 만들어 주신겁니다. 예수님이 여인에게 돕는 배필이 되어 주셨습니다. 성서를 읽다 과부와 고아 표현이 나오면 그냥 지나쳐지지 않습니다. 주님도 그냥 가시지 않았는데 내가 훌쩍 지나갈 순 없지요. 일상에서도 이렇게 되어야겠지요. 당신 과부냐고, 고아냐고 물어볼 일이 아닙니다. 과부처럼, 고아처럼 보면 될 일입니다. 내가 그렇게 느낄 때가 있듯 저 사람도 그렇게 느낄 때가 있겠거니 하며 사랑과 연민을 나누면 될 일입니다. 오늘 68편의 제목이 “나라를 구하신 하나님을 찬양” 입니다. 과부와 고아를 구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바꿔도 좋을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합니다. 하나님 어머니를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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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주님이 약자편에 서주었다는것이 물질적인 도움을 주었다는 말보다 더 크게 제 마음에 와닿습니다. 모르는 남을 돕는 것에 비해 내가 속한 조직에서 약자를 배려하는 일은 오히려 더 어렵습니다. 지금까지 지켜진 질서가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가족에서 약자는 누구일까요. 자기의 의견이 반영이 안되는 목소리 작은 사람이겠지요. 사무실에서는 경력이 적고 직급이 낮은 직원이겠지요. 내가 더 지위가 높고 경험이 많다고 부하를 책망하고 힘으로 누른적은 없나요. 주님은 성경에서 일반론적인 세상의 선악을 말하고자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로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하루 내주위에서 내 눈치를 보는 사람이 누구인가 돌아보고 싶습니다. 약자의 편에 서주고 그와 동등한 자리에 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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