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69편: 정직한 기도

해설:

이 시편은 다윗의 시로서, 곤경에서 올리는 탄원의 기도입니다. 다윗이 처한 곤경에 대해서는 이 시편의 여러 곳에서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는 지금 “까닭도 없이 미워하는 자들”과 “거짓 증거하는 원수들”(4절)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어리석음”과 “죄”를 잘 알고 있습니다(5절). 곤경에 빠진 원인이 자신에게 없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는 “금식하며 울었고”(10절) “베옷을 입고서 슬퍼”(11절)했습니다. 하지만 원수들은 그의 행동을 비웃고 조롱합니다(12절). 그뿐 아니라, 그와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까지 그로 인해 조롱 받고 있습니다(6절). 이 상황에서 다윗은 “목까지 물이 차는”(1절) 것 같고 “깊고 깊은 수렁”(2절)에 빠진 것 같은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또한 “친척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어머니의 자녀들에게마저 낯선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8절). 

이런 상황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합니다(1-3절, 13-18절). 간절한 기도로 인해 “목이 타도록 부르짖다가” 지쳤고 “눈이 빠지도록”(3절) 하나님을 기다렸지만,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다윗은 자신은 고통 받더라도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자신 때문에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해 달라고 간청합니다(6절). 자신이 죄로 인해 받아야 할 몫을 다 받은 후에는 한결같은 사랑으로 구원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반기시는 때”(13절)는 죄값을 다 받은 후를 의미합니다. 

이어서 다윗은 원수들에 대한 저주의 기도를 올립니다(22-29절).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악담을 기도로써 원수들에게 퍼붓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에 응답 하시어 원수들을 징계하시면 찬양으로 그분을 높이고 감사의 노래로 그분의 위대하심을 전하겠다고 약속합니다(30-36절). 하나님께서는 소나 황소를 바치는 것보다 마음 다한 찬양을 더 좋아하시기 때문입니다(31절). 그분은 “온유한 사람들”과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32절)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33절)을 살피시고 인도하십니다. 그렇기에 다윗은 온 땅을 향해 오직 하나님 만을 찬양 하라고 권면합니다. 주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결국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35-36절). 

이 시편은 메시아에 대한 예언 시편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신약의 저자들은 예수님과 관련하여 이 시편의 구절들을 자주 인용했습니다(마 27:34, 48; 막 15:36; 눅 23:36; 요 2:17; 15:25; 19:28; 행 1:20; 롬 11:9-10; 15:3).  이 시편이 묘사하고 있는 상황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것이지만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에게 가장 집약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주님의 종”(17절)이라는 표현은 이사야 53장에 예언된 고난의 종을 생각하게 합니다. 

묵상:

시편을 읽다 보면 저주의 기도를 가끔 만납니다. 시편 109편이 대표적입니다. 69편에도 악담의 기도(22-29절)가 나옵니다. 시편의 기도를 ‘모범 기도문’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저주 기도를 만날 때 당황합니다. 원수까지도 용서하라고 하신 하나님 앞에서 이런 기도를 드리는 것은 옳지 않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편은 기도자들이 실제 삶의 현실에서 드린 기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저주의 기도를 읽으면서, 믿는 이들도 때로는 이처럼 절박한 상황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이 기도를 통해 우리의 감정에 정직하게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마음 속에는 원한이 들끓고 있는데 하나님 앞에서 그렇지 않은 척 행동하는 것은 부질 없는 일일 뿐 아니라 해로운 일입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속 감정을 숨겨 보아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있을 때 상담가를 찾는 이유는 마음의 쓰레기를 꺼내 보일만한 안전한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상담가 보다도 더 안전한 분입니다. 마음에 용암처럼 들끓고 있는 분노를 하나님 앞에 쏟아 놓는 것은 가장 확실한 치유와 회복의 힘이 됩니다. 그렇게 기도할 때 그 사람은 얼마 후 원수를 향해 타오르던 불이 꺼져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은 진리와 정의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거대한 계획 속에서 온 우주를 다스리시며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십니다. 그런 하나님께 우리는 우리 각자의 상황에서 우리 각자의 관심사를 기도로써 올려 드립니다. 그분은 우리의 작은 기도를 그분의 큰 계획 안에서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어떤 기도는 간구한 그대로 응답해 주시고, 어떤 기도는 간구한 것을 거절하심으로 응답하십니다. 우리의 눈에 거절처럼 보인다 해도 하나님의 큰 계획 안에서는 그것도 응답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원하는 시간에,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분의 큰 계획 안에 있으면 우리의 거절된 기도 역시 축복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감정에 정직하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기도 중에 말한 그대로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기도 중에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실제로 영어 속담에 “무엇을 기도할지 조심하라. 그대로 이루어질지도 모르니”(Be careful what you ask God for you just might get it)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잡신 수준으로 깎아 내리는 일입니다. 우리가 좋은 것을 구해도 하나님은 거절하실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원수를 향하여 저주의 기도를 드려도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거절하실 수 있습니다. 진리와 정의와 사랑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받으셔서 응답할 것과 거절할 것을 분류하십니다. 그렇게 정직하게 기도할 때 기도 과정을 통해 우리의 마음은 정화되고 변화되어 마침내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있습니다. 

5 responses to “시편 69편: 정직한 기도”

  1. 주님 앞에서도 정직하지 못하고 핑계만 하는 죄인입니다; 속 사람은 추한데 겉 모양 만 치장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고 원수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을 원합니다. 비록 기도의 응답이 없더라도 감사하며 사는 믿음을 원합니다. 믿음의 가족들과 더불어 가장 적절한 시간에 가장 적절한 응답으로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확신을 갖고 사는 삶을 살아내는 오늘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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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나로인해 방해가 되지 않게 하여주십시요, 주님은 내 어리석음을 잘 알고 계시니 긍휼과 자비로 감싸주실 것을 구합니가.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으로 원수까지도 용서하는 예수님을 본 받아 내 안에 있는 분노를 삭혀나가게 이끌어 주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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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나약하고 부족하고 어리석은 인간이 어찌 하나님의 마음과 그분의 계획을 알 수 있으리오. 다만 말씀에 의지하여 기도할 뿐입니다. 기도는 자신을 위한 기도보다 이웃과 교회와 나라와 민족과 세계복음 전파를 위해 기도할때 하나님께서는 나의 모든것을 감찰하시고 계시니 필요한것을 채워주십니다. 주님! 부르시는 그날까지 멈추지 아니하고 기도의 끈이 절단되지 않도록 성령께서 도와 주시옵소서. 아멘. 하나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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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하나님께 기도하는 마음은 한 가지가 아닙니다. 처해 있는 상황에 따라 기도가 달라지기도 하고, 머리와 감정 중에 어느 편이 앞서는가에 따라 기도말이 다르기도 합니다. 어느 해에 교회에서 성경쓰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손으로 공책에 쓰거나 교회에서 링크해 주는 페이지에 타이핑을 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하루에 한 장씩 쓸 수도 있고, 컴퓨터로 쓰는 사람은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여러 장을 썼습니다. 쓰려면 읽어야 하니까 세밀한 읽기는 아니어도 성경을 통독하는 한 방법이 되기도 했습니다. 친한 권사님도 같이 했는데 한 번 통독은 완주를 했고, 두번째 또 쓸 때는 사이트에 문제가 생겨 컴퓨터 쓰던 사람들은 중단을 했습니다. 그 때 시편을 제대로 다 읽었는데 다윗이 참 “이상한” 성격을 가졌다고 생각 했더랬습니다. 찬양과 저주의 폭이 너무 커서 같은 사람 입에서 나오는 기도 맞나 싶었습니다. 69편을 읽을 때 더더욱 그렇게 생각했었던 것 같습니다. 기도에 대한 당시 나의 생각이 상당히 경직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도 뿐 아니라 믿음이며 교회에 대한 시각도 오픈되어 있지 않았고, 나의 하나님 생각 특히 내가 고백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에 대한 고민도 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의 믿음, 나의 신학은 다분히 교리적이요, 교회에서 듣고 배운 데 머무를 뿐 하나님과의 일대일 사귐에 바탕을 두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를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좋은 책을 읽고 깨달음을 얻어도 내 삶까지 그 지혜를 끌어오지 못했습니다. 교회에서 배운 언어와 생각의 산이 한 가운데 버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로 사고의 “해체”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오늘 69편을 읽으니 다윗의 자리에 내가 대신 들어가 있는 것을 봅니다. 표현은 달라도 시인의 절절한 심정은 내 심정과 다르지 않은 것을 봅니다. 나만 아니라 억울함과 안타까움을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담긴 것을 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나의 모습이 여럿일진대 찬양과 저주의 언어가 뒤섞여 나오는 것을 나무랄 수 없겠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 “아버지!” 소리가 저절로 터져 나올 때가 있습니다. ‘큰 일 났어요!’ ‘어쩌면 좋아요!’ ‘해결해 주세요!’ 다급한 마음일 땐 아버지 하나님을 찾습니다. “물이 내 목까지 찼습니다. 건져주소서 (1절)” 다윗의 외침 속에 내가 있습니다. 이런 기도가 필요 없는 삶, 그림 같은 호수에 얌전히 떠 있는 배 같은 삶은 예수님을 시험하는 사탄이 약속하는 삶이지 아브라함과 야곱의 하나님, 욥과 내시의 하나님은 주시지 않을 지 모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디서나 우리를 품고 계시는 어머니 같은 분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이 나의 기도에도 귀기울여 주시니 얼마나 감사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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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기도를 통해 주님을 만나 제 진실한 이야기를 드릴수 있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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