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사합니다

    <사귐의 소리>를 통해 영적 여정에 함께 하신 모든 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올해에도 하루도 밀리지 않고 해설과 묵상을 나눌 수 있는 건강과 환경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사귐의 소리>를 시작한 지 이제 6년째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이 블로그를 시작한 것은 교우들이 ‘주일 신자'(Sunday Christian)가 아니라 ‘매일 신자'(Everyday Christian)로 살도록 돕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팬데믹을 지나면서 “나 자신을 위해 이 일을 시작하게 하셨구나!”라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 일에 저 자신을 묶어 놓지 않았더라면 팬데믹을 지나면서 저의 영혼이 많이 황폐해졌을 것입니다.

    지금 와서 깨닫는 사실이 있습니다. 영성은 쌓아 올리는 것이 아니라 매일 하나님과 살아 있는 관계 안에 머물러 사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영적 생활을 지속하면 거룩한 성품이 형성됩니다. 그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매일 새롭게 하나님 앞에 서고 매일 더 깊은 사귐으로 나아가는 일입니다. 매일 샤워를 하고 매일 옷을 새로 입는 것처럼.

    월요일부터는 <사귐의 소리 2023>으로 여러분을 찾아 뵙습니다. <사귐의 소리 2022> 초기 화면에 있는 <바로가기>를 누르시면 새 블로그로 가실 수 있습니다. 그 싸이트를 Home Screen에 저장하여 보셔도 좋고, 이메일을 입력하시면 매일 자동으로 전송됩니다.

    새해에는 주님께서 어떤 은혜로 우리를 만나 주실지 설렘으로 기다립니다. 감사합니다.

    김영봉 드림

  • 시편 71편: 쓸 모 없어져도

    해설:

    이 시편에는 탄원시(1-18절)과 찬양시(19-24절)가 결합되어 있습니다.  

    먼저 탄원시에서 시인은 늙고 병들어 쓸모 없어진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구합니다. 그는 먼저 “하나님의 의”(2절)에 의존하여 자신을 도와 주시기를 기도합니다(1-4절). 지금 그는 악한 사람들의 위협에 떨고 있습니다. 시인은 자신이 얼마나 신실하게 하나님을 의지해 왔는지를 말씀 드립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주님을 믿어 왔고(5절) 태어날 때부터 주님을 의지해 왔습니다(6절). 그가 많은 사람들에게 비난의 표적이 되었을 때 주님께서는 그를 구해 주셨습니다(7절). 그는 온종일 하나님을 찬양하고 주님의 영광을 선포하며 살아 왔습니다(8절).

    그런데 지금 그는 늙어서 쇠약해져 있고(9절) 적들은 그를 하찮케 여기고 음모를 꾸밉니다(10-11절). 시인은 사람들에게 하찮아진 자신을 하나님께서는 하찮케 여기지 말아 주시기를 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손을 펼치셔서 그를 공격하는 자들을 징벌해 주시기를 구합니다(12-13절). 그렇게 되어야만 그는 희망을 하나님께 두고 계속 찬양하며(14절) 주님의 의로우심을 전할 것입니다(15-16절). 그는 자신이 어릴 적부터 하나님을 의지해 왔음을 다시금 강조하면서(17절) 늙고 병든 자신을 버리지 말아 달라고 간청합니다(18절).

    19절부터는 찬양시로 바뀝니다. 이 부분은 시인이 구원을 받은 후에 쓴 것일 수도 있고, 아직 응답을 받지는 못했지만 응답 받을 것을 믿고 쓴 것일 수도 있습니다.

    시인은 “주님의 의로우심이 저 하늘 높은 곳까지 미칩니다”(19절)라고 고백합니다. 그 의로우심은 그의 개인사에서 여러 번 증명되었습니다. 그가 비록 많은 재난과 불행을 당했지만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구해 주셨습니다(20-21절). 그러므로 시인은 여러 가지 악기를 동원하여 하나님을 찬양 하겠다고 고백합니다(22절). 그는 찬양의 비밀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주님을 찬양할 때에, 내 입술은 흥겨운 노래로 가득 차고, 주님께서 속량하여 주신 나의 영혼이 흥겨워할 것입니다”(23절)라고 고백합니다. 그뿐 아니라 찬양은 원수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비밀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찬양은 역설적으로 가장 강력한 공격이라 할 수 있습니다(24절). 

    묵상:

    이 시편에서 시인은 두 번이나 자신의 쓸 모 없어진 상태를 묘사합니다(9절, 18절). 인간적인 기준으로 그는 늙고 병들어 하찮게 보였던 것입니다. 시인은 사람들의 눈에 쓸 모 없어진 자신이 하나님께도 쓸 모 없어 보이는 것은 아닌지 염려합니다. 그래서 그는 두 번씩이나 하나님께 자신을 버리지 말아 달라고 간청합니다. 자신이 늙고 병들어 쓸 모 없어졌어도 여전히 자신을 사랑해 주시기를 구합니다. 

    그렇게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이 시편에서 “의”라는 말이 하나님과 관계하여 다섯 번 사용되었습니다(2절, 15절, 16절, 19절, 24절).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다”라는 말은 “그분은 당신의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시다” 혹은 “그분은 믿을만한 분이시다”라는 뜻입니다. 그런 분이시기에 시인은 늙고 병들어 쓸 모 없어진 자신을 하나님께서 계속 사랑해 주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인간 세상은 사람의 가치를 “쓸 모”에 기준하여 판단합니다. 쓸 모가 없어지면 가차 없이 버림 받습니다. 우리 모두는 사람들에게 인정 받고 사랑 받기 위해 자신의 쓸 모(가치)를 높이려고 발버둥 칩니다. 하지만 우리는 누구나 결국 늙고 병들어 쓸 모 없어집니다. 그럴 때면 우리는 모두에게 버림 받을 것 같은 두려움에 빠집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쓸 모 있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당신의 피조물이라는 한 가지 이유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분의 사랑은 “한결같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의로운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쓸 모가 더 있어서 우리를 더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쓸 모가 없어서 덜 사랑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의 상태에 상관 없이 절대적 분량으로 사랑하십니다. 그것이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증명된 그분의 사랑입니다. 

  • 시편 70편: 구원을 호소하는 이유

    해설:

    이 시편은 다윗의 탄원기도입니다. 학자들은 이 시편이 원래 71편과 하나였는데, 편집 과정에서 분리되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하지만 처음(1절)과 끝(5절)이 같은 간구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수미쌍관법) 독립된 시편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다윗은 그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2)로부터 위협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가 재난 당하는 것을 기뻐하며 깔깔대며(개역개정 “아하, 아하”) 조롱합니다(3절). 그들의 공격으로 인해 다윗은 위협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청합니다. 그가 하나님께 구원을 청하는 근거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 너그럽게 보시고 나를 건져 주십시오”(1절)라고 기도합니다. 그는 “주님을 찾는 사람은 누구나”(4절) 구원을 경험하고 하나님께 “주님은 위대하시다”(4절)라고 찬양하게 해 주시기를 구합니다. 

    그러기 위해 하나님은 지금 곤경에 처해 있는 자신을 구해 주셔야 합니다. 다윗은 이런 근거에서 “빨리” “지체하지 말고”(5절) 자신을 구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묵상:

    때로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의 증거가 됩니다. 사람들이 믿는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보고 하나님의 존재 여부를 판단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신실하게, 진실하게, 철저하게 의지하고 사는 사람들에게 불행한 일이 일어나면 그것 보라고,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고 조롱합니다.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으며 인생은 랜덤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상황에 처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마음이 아픕니다. 자신이 고통 당하는 것은 견딜 만한데, 자신으로 인해 하나님이 모욕 당하는 것은 참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 곤경에서 구해 주셔서 자신을 지켜 보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 판단이 언제나 진실은 아닙니다. 믿는 이들이 불행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이 없다는 증거도 아니고,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도 아닙니다. 성숙한 믿음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행과 불행을 초월하여 언제나 하나님의 존재와 다스림을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섭리 안에서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 하기도 하시고 때로 징계 하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 있음에도 좋은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 하기도 하십니다. 따라서 좋은 일이 일어난다고 해서 마냥 좋아할 것도 아니고 불행을 당하고 있다고 하여 하나님의 존재나 사랑을 의심할 것도 아닙니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그분의 다스림 안에 머무는 일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하여 선한 결과를 만들어내실 것입니다(롬 8:28).   

  • 시편 69편: 정직한 기도

    해설:

    이 시편은 다윗의 시로서, 곤경에서 올리는 탄원의 기도입니다. 다윗이 처한 곤경에 대해서는 이 시편의 여러 곳에서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는 지금 “까닭도 없이 미워하는 자들”과 “거짓 증거하는 원수들”(4절)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어리석음”과 “죄”를 잘 알고 있습니다(5절). 곤경에 빠진 원인이 자신에게 없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는 “금식하며 울었고”(10절) “베옷을 입고서 슬퍼”(11절)했습니다. 하지만 원수들은 그의 행동을 비웃고 조롱합니다(12절). 그뿐 아니라, 그와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까지 그로 인해 조롱 받고 있습니다(6절). 이 상황에서 다윗은 “목까지 물이 차는”(1절) 것 같고 “깊고 깊은 수렁”(2절)에 빠진 것 같은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또한 “친척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어머니의 자녀들에게마저 낯선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8절). 

    이런 상황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합니다(1-3절, 13-18절). 간절한 기도로 인해 “목이 타도록 부르짖다가” 지쳤고 “눈이 빠지도록”(3절) 하나님을 기다렸지만,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다윗은 자신은 고통 받더라도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자신 때문에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해 달라고 간청합니다(6절). 자신이 죄로 인해 받아야 할 몫을 다 받은 후에는 한결같은 사랑으로 구원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반기시는 때”(13절)는 죄값을 다 받은 후를 의미합니다. 

    이어서 다윗은 원수들에 대한 저주의 기도를 올립니다(22-29절).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악담을 기도로써 원수들에게 퍼붓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에 응답 하시어 원수들을 징계하시면 찬양으로 그분을 높이고 감사의 노래로 그분의 위대하심을 전하겠다고 약속합니다(30-36절). 하나님께서는 소나 황소를 바치는 것보다 마음 다한 찬양을 더 좋아하시기 때문입니다(31절). 그분은 “온유한 사람들”과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32절)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33절)을 살피시고 인도하십니다. 그렇기에 다윗은 온 땅을 향해 오직 하나님 만을 찬양 하라고 권면합니다. 주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결국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35-36절). 

    이 시편은 메시아에 대한 예언 시편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신약의 저자들은 예수님과 관련하여 이 시편의 구절들을 자주 인용했습니다(마 27:34, 48; 막 15:36; 눅 23:36; 요 2:17; 15:25; 19:28; 행 1:20; 롬 11:9-10; 15:3).  이 시편이 묘사하고 있는 상황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것이지만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에게 가장 집약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주님의 종”(17절)이라는 표현은 이사야 53장에 예언된 고난의 종을 생각하게 합니다. 

    묵상:

    시편을 읽다 보면 저주의 기도를 가끔 만납니다. 시편 109편이 대표적입니다. 69편에도 악담의 기도(22-29절)가 나옵니다. 시편의 기도를 ‘모범 기도문’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저주 기도를 만날 때 당황합니다. 원수까지도 용서하라고 하신 하나님 앞에서 이런 기도를 드리는 것은 옳지 않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편은 기도자들이 실제 삶의 현실에서 드린 기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저주의 기도를 읽으면서, 믿는 이들도 때로는 이처럼 절박한 상황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이 기도를 통해 우리의 감정에 정직하게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마음 속에는 원한이 들끓고 있는데 하나님 앞에서 그렇지 않은 척 행동하는 것은 부질 없는 일일 뿐 아니라 해로운 일입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속 감정을 숨겨 보아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있을 때 상담가를 찾는 이유는 마음의 쓰레기를 꺼내 보일만한 안전한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상담가 보다도 더 안전한 분입니다. 마음에 용암처럼 들끓고 있는 분노를 하나님 앞에 쏟아 놓는 것은 가장 확실한 치유와 회복의 힘이 됩니다. 그렇게 기도할 때 그 사람은 얼마 후 원수를 향해 타오르던 불이 꺼져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은 진리와 정의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거대한 계획 속에서 온 우주를 다스리시며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십니다. 그런 하나님께 우리는 우리 각자의 상황에서 우리 각자의 관심사를 기도로써 올려 드립니다. 그분은 우리의 작은 기도를 그분의 큰 계획 안에서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어떤 기도는 간구한 그대로 응답해 주시고, 어떤 기도는 간구한 것을 거절하심으로 응답하십니다. 우리의 눈에 거절처럼 보인다 해도 하나님의 큰 계획 안에서는 그것도 응답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원하는 시간에,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분의 큰 계획 안에 있으면 우리의 거절된 기도 역시 축복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감정에 정직하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기도 중에 말한 그대로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기도 중에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실제로 영어 속담에 “무엇을 기도할지 조심하라. 그대로 이루어질지도 모르니”(Be careful what you ask God for you just might get it)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잡신 수준으로 깎아 내리는 일입니다. 우리가 좋은 것을 구해도 하나님은 거절하실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원수를 향하여 저주의 기도를 드려도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거절하실 수 있습니다. 진리와 정의와 사랑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받으셔서 응답할 것과 거절할 것을 분류하십니다. 그렇게 정직하게 기도할 때 기도 과정을 통해 우리의 마음은 정화되고 변화되어 마침내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있습니다. 

  • 시편 68편: 지극히 낮은 곳에 오신 지극히 높으신 분

    해설:

    이 시편은 다윗의 찬송시로 되어 있습니다. 이 시편도 역시 추수를 감사하는 예배에서 불려졌던 찬송이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일어나실 때”(1절) 모든 원수들은 흩어지고 악인들은 녹아 버릴 것이며(2절) 의인들은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라고 고백합니다(3절). 그러면서 다윗은 회중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권고합니다(4절). 그 위대하고 전능하신 분은 “고아들의 아버지, 과부들을 돕는 재판관”(5절)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분은 “외로운 사람들에게 머무를 집을 마련해 주시고, 갇힌 사람들을 풀어”(6절) 주십니다. 한 없이 크신 분이지만 한 없이 작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시는 분이시고, 가장 높은 분이지만 또한 낮은 곳을 살피시는 분입니다. 반면, 그분을 거역하는 사람은 “메마른 땅”(6절)에 서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이어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인도하실 때의 장면을 회상합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실 때 그분이 행하신 일들은 놀라웠습니다(7-9절). 또한 백성이 가나안 땅에 정착 했을 때 “메마른 땅으로 옥토로 만드시어”(9절) “주님의 식구들을 거기에서 살게 하셨습니다”(10절). 하나님이 이렇게 행하신 이유는  “가난한 사람을 생각하셔서”(10절) 하신 일입니다.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을 돌보아 주신 것입니다. 또한 주님은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하도록 도우셨습니다(11-14절). 

    “바산의 산”(15절)은 이스라엘의 북쪽 산악 지방을 가리킵니다. 이곳에 사는 이방인들은 그 높은 산세 만큼이나 강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스라엘에게는 항상 위협이 되었습니다. 바산의 산에 비하면 시온 산은 낮은 언덕처럼 보였습니다. 다윗은 그것을 은유로 사용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산의 높은 산들을 제쳐 두고 시온 산을 당신의 거처로 삼으셨습니다(16절). 마찬가지로 그분은 크고 강대한 나라들을 제쳐 두고 가장 연약한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선택하셨습니다. 하지만 시온의 하나님은 바산의 하나님이기도 하십니다(15절). 시온 산에서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은 모든 민족을 다스리십니다(17-18절). 

    다윗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일들을 회상한 다음 다시금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권면으로 돌아갑니다(19절). 열국을 다스리시는 그 위대하신 하나님은 또한 한 사람 한 사람의 근심을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짐을 대신 짊어”(19절)지시고 “우리를 죽음에서 구원하여 내시는”(20절) 분이십니다. 그분은 죄악을 일삼는 자들을 징벌하시는 분이십니다(20-23절). 그런 분이 우리의 근심을 살피시고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24절부터 27절까지는 예배를 위해 제사장들과 합창대와 회중이 행진하여 들어가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그 행렬의 장엄함은 곧 하나님의 위엄을 상징합니다. 그러면서 다윗은 하나님께 “주님의 능력을 나타내 보이십시오”(28절)라고 기도합니다. 29절부터 32절에서 다윗은 세상의 왕들이 온갖 귀한 예물을 가지고 성전으로 오고 있는 모습을 그립니다. 그것은 다윗이 예배 중에 마음으로 상상했던 광경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능력을 나타내 보이실 때면 그런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태고의 하늘을 병거 타고 다니시는 분”(33절)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영원 하시고 전능 하시다는 의미입니다. 그분은 “성소에 계시는 하나님”(35절)이시지만 또한 “그의 위엄은 이스라엘을 덮고, 그의 권세는 구름 위에”(34절)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분을 아는 사람들은 마땅히 그분을 찬송하고 그분의 위엄을 높여야 합니다.

    묵상:

    하나님은 위대하시고 전능하시고 영화로우십니다. 그분은 온 인류의 주님이시고 모든 나라의 왕이십니다. 그분이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시면 그 앞에 설 자가 없습니다. 그분이 숨을 내쉬면 그 앞에서 버틸 자가 없습니다. 그분의 호령에 모든 생명은 두려워 떱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상상할 수 없이 크시고 높으시고 귀하시며 강하신 분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생각하면 우리는 그분 앞에서 두려워 떨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에게서 얼굴을 감추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그 하나님은 또한 “고아의 아버지, 과부들을 돕는 재판관”(5절)이십니다. 그분은 높고 아름다운 모든 산을 제쳐 두고 시온 산을 거처로 삼으셨으며, 크고 강한 모든 나라들을 제쳐 두고 가장 작은 나라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분은 힘 없는 여인들을 돌보시고,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십니다. 가장 높으신 분이 가장 낮은 곳을 살피시고, 가장 강하신 분이 가장 약한 사람들을 도우시며, 가장 크신 분이 가장 작은 사람들을 살피십니다. 

    그분은 오늘 이곳에 사는 나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그렇기에 그분을 내가 오늘 “아빠”라고 부르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분을 생각하며 찬송 드립니다. 온 우주와 온 인류의 주인이시며 왕이신 그분이 나를 찾아 오셨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감격하며 찬송과 경배를 올립니다. 

  • 시편 67편: 선택의 이유

    해설:

    이 시편도 역시 추수를 감사하며 예배 드릴 때 부르는 찬송입니다. 66편과 마찬가지로 저자는 익명으로 되어 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인칭 대명사(“우리”)가 사용된 것을 보면, 이 시편이 공동체의 기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도자들은 아론 제사장의 축도(민 6:23-26)를 기도로 올립니다(1절). “주님의 얼굴을 환하게 우리에게 비추어 주시어서”라는 기도는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 하나님의 은혜가 막힘없이 경험되는 상황을 가리킵니다. 예배란 이러한 관계를 회복하자는 것이며 또한 그런 관계를 누리자는 뜻입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이유는 “온 세상이 주님의 뜻을 알고 모든 민족이 주님의 구원을 알게”(2절)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이유는 그들을 통해 만민이 구원받게 하려는 뜻이었습니다. 기도자들은 자신들을 선택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 만민이 주님을 알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기도자들은 민족들을 위해 중보의 기도를 올립니다. 모든 민족이 주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주님을 찬양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3절). 주님께서는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을 공의로 심판 하시고 다스리십니다(4절). 그 사실을 안다면 모든 민족이 주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5절). 기도자들은 “민족들…, 모든 민족들…”이라고 표현함으로써(3절, 5절) 하나님의 다스림에 들지 않는 민족이 없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기도자들은 풍요로운 추수에 대한 감사 기도로 돌아 옵니다. 지금 오곡백과를 풍성하게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6절). 그러므로 온 땅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그분을 찬양해야 합니다(7절).

    묵상: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택하신 이유는 이스라엘만 축복 하시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만민을 구원하기 위해 한 민족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복을 받았다면 그것은 모든 민족에게 복을 받는 길을 보여 주려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고난을 당했다면 그것도 역시 모든 민족에게 보여주시려는 본보기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제사장 백성으로서의 그 사명을 잊지 말아야 했습니다. 이 시편은 그런 뜻에서 지어졌고 불려졌을 것입니다. 이 찬송을 부르면서 제사장 백성으로서의 사명을 기억하라는 뜻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제사장 백성으로서의 사명은 망각하고 그것을 특권으로 여겼습니다. 그로 인해 그들에게 주어졌던 선택이 취소되고 하나님은 새로운 언약 백성을 세우셨습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을 대신한 새로운 언약의 백성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따로 또 같이” 새 언약 백성의 사명을 이뤄야 합니다. “따로”라 함은 믿는 이들이 각자의 일상 생활 속에서 복의 근원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함이고, “같이”라 함은 믿음의 공동체를 통해 그 일을 이루는 것입니다. 

    나의 기도 안에 이웃에 대한 관심이 담겨 있어야 하고, 믿음의 공동체가 드리는 기도 안에 온 세상을 향한 기도가 담겨 있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 시편 66편: 회의와 불신의 밤을 지날 때

    해설:

    이 시편 역시 찬송시로서 저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시인은 먼저 온 땅, 모든 백성에게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권고합니다(1-4절). “주님께서 하신 일”(3절)을 알아보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하신 일 중에서도 특별히 “사람들”(5절, 개역개정은 “사람의 아들들”)에게 하신 일이 얼마나 놀라운지 보라고 합니다. 그 예가 출애굽의 사건입니다(6절).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홍해를 건넌 사건은 가장 기억할만한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그 사건은 하나님께서 “영원히, 능력으로 통치하는 분”(7절)이라는 사실을 확증해 줍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교만입니다.

    이런 근거에서 시인은 다시금 만민들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권고합니다. 우리의 생명과 안전이 그분의 손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8-9절). 출애굽의 사건은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난 사건이었지만,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시련의 기간이었습니다(10절). 그 시련은 때로 견디기 힘든 고난을 안겨 주었지만, 하나님은 결국 그들을 구해 주시고 목적지에 이르게 하셨습니다(11-12절). 

    시인은 최근에 극심한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 환난 중에 시인은 출애굽의 사건을 기억했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서원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환난에서 건져 주셨고, 시인은 그 서원을 지키기 위해 성전에 와서 최선의 제물로 번제를 드리고 있습니다(13-15절). 시인은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16절)은 제사의 자리에 와 있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시인은 자신이 겪은 일을 말해 줄테니 들어 보라고 말합니다. 그는 고난 중에 주님께만 부르짖었고 마음 속으로 악한 생각을 품지 않았습니다(17-18절). 그랬기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기도를 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19절). 

    시인은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하나님께 찬양을 올립니다. 그분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않으시고, 한결같은 사랑을 나에게서 거두지 않으시는”(20절) 분이기 때문입니다.

    해설:

    환난의 정도가 지나치거나 오래 지속되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기 쉽습니다. 하나님에게 버림 받은 것 같기도 하고, 하나님이 계시다는 말이 거짓말 같기도 합니다. 혹은 하나님이 자신을 표적 삼아 공격하는 것처럼 느끼기도 합니다. 그럴 때 믿음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지켜 주는 것이 ‘기억’입니다. 과거에 주님께서 행하신 일을 기억하면 믿음을 흔드는 회의와 혼란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자신의 개인 삶에 일어난 일이든, 역사 속에서 일어난 일이든,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면, 그 하나님께서 지금도 일하고 계심을 믿고 그분을 의지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극심한 환난을 당하여 수 많은 회의의 밤을 지냈습니다. 그 때 그는 출애굽의 사건을 기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행하신 일들을 하나씩 더듬어 보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조상들이 겪은 시련과 고난을 헤아려 보았습니다. 그 기억은 그로 하여금 회의와 불신의 밤을 통과하여 다시 하나님을 붙들게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서원하며 기도했고, 결국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성전에 나와 서원을 지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과 돌봄 아래에 산다는 말은 아무런 어려움 없이 꽃길만 걷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때로 우리 스스로 고난을 자초하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 고난의 길로 인도하기도 하십니다. 불에 달구고 망치로 때리지 않으면 쇠가 연단되는 법은 없는 것처럼, 인간이 성장하고 성숙하기 위해서 고난은 필수입니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기억하고 믿음의 길에 서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고난의 방망이에 산산히 깨져 버립니다. 

  • 시편 65편: 복음의 메아리

    해설:

    이 시편은 찬송시입니다. 61편부터 64편까지 이어진 탄원시와는 분위기가 전혀 다릅니다. 65편부터 67편까지는 온 세상과 모든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노래합니다. 

    다윗은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그분을 찬양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는 사실을 알며 주님께 드린 서원을 지키기를 기뻐합니다(1절). “육신을 가진 사람”(2절, 개역개정 “모든 육체”)은 피조물로서의 인간을 가리킵니다. 자신이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인지한다면 창조주 앞에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피조물로서의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죄’입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3절). “주님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4절) 하셨다는 말은 죄를 해결해 주셨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뜰에 머물게 하신” 것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모습을 생각하게 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피조물에게 가장 큰 복은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사는 것입니다. 그 관계 안에서 복을 누리는 사람은 온전한 만족을 누립니다(23:1). 

    이어서 다윗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온 세상과 모든 민족을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5-8절). 주님은 정의로 세상 모든 사람들을 다스리십니다. 따라서 인간이 의지할 대상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온전한 정의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기 때문입니다. 볼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세상사와 인생사를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보고 두려워 떨며 찬양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은 또한 사랑스런 돌보심으로 드러납니다(9-13절). 하나님은 땅과 물을 주관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강”(개역개정)이라고 표현합니다. 팔레스타인 땅에서의 농사는 철저히 강우량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다윗은 한해 동안 넉넉한 비로 산천을 푸르게 하고 풍년을 맞게 하신 은혜를 노래하며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올립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이 찬송시는 추수를 감사하는 축제 때에 불렸을 것으로 보입니다. 

    묵상:

    이 시편에서 우리는 복음의 메아리를 듣습니다. 인간의 가장 큰 문제는 죄의 문제이며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육신을 가진 사람”(2절) 즉 피조물은 창조주와의 사랑의 관계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오직 그럴 때에만 인간은 참된 만족과 안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죄는 우리를 창조주의 사랑으로부터 벗어나 살게 합니다. 우리는 죄를 탐하는 동시에 그 죄에 짓눌려 삽니다. 죄를 미워하지만 죄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모순적인 존재입니다. 죄에 대해 인간이 속수무책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편에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방법은 없습니다. 율법의 의를 쌓아 올려서 하나님의 기준에 이를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상황을 불쌍히 여기셔서 죄의 문제를 해결할 길을 열어 주셔야만 가능합니다. “저마다 지은 죄 감당하기에 너무 어려울 때에, 오직 주님만이 그 죄를 용서하여 주십니다”라는 고백에서 다윗은 죄에 대한 인간의 무력감을 토로합니다. 또한 “주님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시어 주님의 뜰에 머물게 하신 그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4절)라는 고백에서 다윗은 하나님 편에서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갈망한 것입니다.  

    다윗은 여기서 알지도 못하는 중에 예언을 했다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여기서 고백하고 기도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롬 5:8)라고 했으며,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일 때에도,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하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롬 5:10)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머물 때 “우리는, 주님의 집, 주님의 거룩한 성전에서 온갖 좋은 복으로 만족하렵니다”(4절)라는 소망이 이루어집니다. 

  • 아가서 8장: 사랑의 불길

    해설:

    여자는 사랑하는 님과 함께 하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까워 하면서 차라리 가족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상상합니다(1-2절). 그랬다면 헤어질 이유도 없었을 것이고, 집에 함께 있어도 누가 뭐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도 남매 사이의 성관계는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여자가 이런 상상을 하는 이유는 사랑하는 님과 함께 있고 싶은 갈망 때문입니다. 그 상상 속에서 여자는 남자와 사랑을 나눕니다(3절). 여자는 마음껏 사랑하기까지는 깨우지 말아 달라고 부탁합니다(4절).

    친구들은 남자가 여자를 안고 달려오는 모습을 상상합니다. 여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님을 깨웠다고 말하며, 자신을 님의 마음에 새겨 달라고 청합니다. 그 사랑의 불길은 다른 무엇으로도 끌 수 없습니다(5-7절). 친구들은 그 여인이 사랑을 나누기에 육체적으로 성숙해지지 않았다고 말합니다(8-9절). 그러자 여자는 자신은 충분히 성숙했으며 자신에게 있는 포도밭(성숙한 몸)을 사랑하는 님에게 주겠다고 답합니다(10-12절). 그 때 남자는 다시 여인에게 그의 목소리를 들려 달라고 청합니다(13절). 그런가 하면 여자는 자신에게 빨리 달려와 달라고 남자에게 청합니다(14절).

    묵상:

    성경에서 문학가들에게 가장 자주 언급된 구절 중 하나가 6절(“사랑은 죽음처럼 강한 것, 사랑의 시샘은 저승처럼 잔혹한 것, 사랑은 타오르는 불길, 아무도 못 끄는 거센 불길입니다”)입니다. 한 번이라도 사랑의 열병을 앓아 본 사람이라면 이 구절을 읽으며 공감할 것입니다. 사랑의 불길에 자신의 몸을 던지는 사람도 있고, 사랑의 시샘으로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해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불이 기차를 움직이는 동력이 되기도 하고 거대한 산을 불태우는 재앙이 되기도 하는 것처럼, 사랑은 삶에 강력한 동력이 되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사랑의 불길은 내버려 두어서도 안 되고 꺼뜨려서도 안 됩니다. 사랑이 꺼지는 것은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사랑의 불길이 계속 타오르게 하는 것입니다. 때로 강하게, 때로 약하게, 정해진 울타리 안에서 계속 불타도록 관리해야 합니다. 그러한 절제력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 안에서 사랑의 갈망이 채워져야 합니다. 하나님으로 채워져야 할 사랑의 갈망이 채워지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에게서 혹은 다른 대상을 통해 그 사랑을 채우려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의 내면에 채워지면 우리는 더 이상 사람에게서 얻는 사랑에 목을 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안에서 꺼지지 않는 불길이 되어 생명의 동력이 되어 줄 것입니다.      

  • 아가서 7장: 아낌없이 주는 사랑

    해설:

    이번에는 친구들이 여인을 찬미합니다(1-5절). 그들은 여러 가지의 비유를 사용하여 여인의 신체 하나 하나를 묘사합니다. “바드랍빔 성문 옆에 있는 헤스본 연못”(4절)은 사해 동편에 있었던 아름다운 연못입니다. “다마스쿠스 쪽을 살피는 레바논의 망대”는 이스라엘에서 제일 높은 탑입니다. “갈멜 산”(5절)은 이스라엘 전역이 눈에 들어오고 저 멀리 지중해까지 보이는 산입니다. 

    이번에는 남자의 노래가 이어집니다(6-8절). 그는 여인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며 그를 만나게 되기를 갈망합니다. 여인 또한 남자를 그리며 노래합니다(9-13절). 그는 사랑하는 님과 함께 들로 나가서 밤새도록 사랑을 나누고 싶어합니다.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님을 위해 아낌없이 주고 싶어합니다. 

    묵상:

    “사랑한다”는 말은 정의하기 가장 어려운 말입니다.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부여하는 의미도 다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자주, 쉽게 입에 올리는 반면, 어떤 사람은 웬만해서는 그 단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말에는 다른 단어로는 전할 수 없는 특별한 감정이 담겨 있다는 사실에는 모두가 동의합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은 “당신이 내게 너무나도 소중한 사람입니다”라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아낌없이 주게 만듭니다. 상대방이 소중하게 느껴질 수록 더 많이, 더 기쁘게 주고 싶습니다. 사랑이 깊으면 주고 또 주어도 만족되지 않습니다. 여인이 사랑하는 님에게 자신의 소중한 모든 것을 주고 싶어하는 것처럼, 사랑은 나의 모두를 혹은 나에게 가장 귀한 것을 주고 싶게 만듭니다. 그래서 때로 부모가 자녀를 위해 생명을 내어 주는 것이고,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자기 중심적인 감정은 사랑이라는 말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집착입니다. 

    아낌없이 주는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입니다(요일 4:7).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 주셨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 15:12)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사랑을 따라 당신의 전부를 주신 것처럼, 우리도 사랑을 따라 우리의 전부를 주도록 힘쓰라는 뜻입니다.